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79)
사는 것은 아픔을 품는 시간 가난한 별빛 아래, 한 여자가 허리를 낮춘다. 그녀의 등허리는 오래된 산맥처럼 굽어 있고, 그 골짜기에는 바람이 스친다. 흙냄새와 피로의 흔적이 어린 손끝으로 찢긴 삶을 헤아려본다. 침을 꽂는 의사는 묻지 않는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아프다는 것을 안다.아픔은 그녀의 몸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와 같다. 매일 아침, 피곤이라는 새가 그 나무에 앉아 울고, 저녁에는 서늘한 어둠이 가지를 감싼다. 그러나 그 나무는 자란다. 아픔은 나무를 키우는 토양이다.젊은 날 그녀의 가슴속에는 한때 사랑이라는 불길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소진되지 않은 채, 여전히 타오르는 화산이 되었다. 그 화산은 한때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켰지만, 이제는 조용히 내뿜는 연기만으로도 그녀를 지탱한다. 사랑은 아픔으로 변..
체포와 구속 그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히며 들려온 소리는 구속의 서막 같았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광경. 높이 솟은 심판대와 차디찬 바닥의 무늬까지도 어딘가 내 안의 기억을 훔쳐본 듯했다.“피고인, 당신은 스스로 이곳에 출두한 죄를 인정합니까?”목소리는 공간의 중심에서 흘러나왔으나,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답할 수 없었다. 답이 무엇인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당신은 눈길 하나로 한 영혼을 전복시키고, 숨결 하나로 수많은 밤을 뒤흔들었습니다. 변명할 기회를 드리죠.”나는 침묵했다.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이름만 맴돌았다. 내가 이곳에 선 이유, 모든 시작의 불씨.그들이 증거라며 내미는 것은 낯선 장면들이었다. 당신의 손길이 머문 자리에 새겨진 깊은 흔적, ..
손때묻은 것들 말 없는 저녁의 색깔은 오래된 반추를 닮아 있었다. 창문 너머 희미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내 안에서 무언가 부드럽고도 낯선 음조로 속삭였다. 그것은 찬 바람이 아닌, 몸에 익은 체온 같은 것이었다.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오래된 열쇠 하나를 꺼냈다. 차갑고 무겁던 기억의 조각들, 날카로웠던 시간을 어루만지며 문득 깨달았다. 이 열쇠는 아픈 것들을 품어낸 시간의 도구였다. 닫힌 문은 없었다. 그저 이 열쇠를 돌리는 행위로 내가 하나의 문이 되어가고 있었다.어느새 나의 손끝에 익은 슬픔은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부드러운 울음이거나, 낮은 웃음이었다. 슬픔은 반지처럼 내 손가락에 끼워져 반짝였다. 빛이 길을 비추는 순간, 그 반지 속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그때의 나였다. 상처 속에 감추어진 빛줄기.세상은 나..
벽의 끝에서 그는 늘 빛을 쫓았다.어둠 속에서 자신을 감춘 채,어딘가에 있을 법한 온기를 향해끝없이 팔을 뻗었다.평평한 땅이 아니고날카롭고 바스락거리는 돌벽,불모의 길을 택한 것도어쩌면 희미한 희망의 방향이었을까.차가운 빗줄기가 피부를 헤집고,맹렬한 태양이 줄기를 태울 때도멈추지 않았다.그는 올라야만 했다.그것은 마치 영원한 약속 같았다.푸르른 허공에 닿는 순간,그는 모든 것을 가질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끝에 다다른 순간 알았다.머리 위로, 손에 닿지 않는 하늘은 텅 비어 있었고,구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으며,바람은 이름 모를 이야기만 속삭일 뿐이었다.그는 자신이 찢긴 틈새에서살아남기 위해 얽히고설킨 그리움을저버린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으니까.그는 기어이 제 무..
손금에 새긴 이름 나무들은 깊이 잠들고 바람마저 길을 잃은 시간.손바닥에 바다를 만들고,그 안에 작은 섬처럼 그대의 이름을 새겼다.물방울처럼 조심스레, 처음엔 잉크 같았으나곧 불꽃이 되어 일렁이며 타올랐다.이름은 점이 되고, 점은 선이 되었다.선들은 얽히고설켜내 손바닥 위에 별자리를 만들었다.별자리는 그대가 머물던 하늘의 조각,세상 모든 강과 산을 품었고,그 길 끝에 그대가 있었다.그러나 손은 차갑다.불처럼 뜨겁던 이름이 한 줄기 얼음이 되어내 살갗을 파고들 때, 나는 깨닫는다.그대를 사랑한다는 건영원히 녹지 않을 얼음불을 품는 일.꽃잎이 지고 난 뒤 빈 가지가 달빛에 젖는 일,얼어붙은 대지 속에서아직 피어나지 않은 씨앗을 믿는 일과 같았다.그대를 사랑한다는 건 기다림이 아니라기다림 속에서 스스로 불이 되는 일이었다.그리..
기차가 떠난 자리 먼 언덕 너머로, 기차는 천천히 그림자를 끌고 갔다.철길은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삼켰는지는오직 남겨진 이들만이 알리라.레일 끝에 스미는 햇살은 금이 간 유리처럼 깨어지고,하얗게 쏟아진 눈발은마치 잃어버린 약속처럼 빗겨 흩어진다.두근거림은 침목 사이에 숨죽이고멀어진 거리는 두 손 가득 공허로 채워진다.그리움은 자라난다.멀어진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길게.덩굴처럼 얽히며 가슴 속에 뿌리내린다.가끔은 스스로조차 깜빡할 만큼그렇게 깊이, 은밀히.지나온 시간 뒤에 남겨진 건결국은 채워지지 않는 허공이다.기차가 떠난 자리,차가운 레일 위를 비추는 저녁빛은단 한 번도 돌아본 적 없는그리움의 등을 어루만진다.노을은 방금 떠나온 길을자꾸만 뒤돌아본다.마치 이제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처럼.그러나..
그리움 너는 내게 한 줌 바람이었다.눈길 위를 건너는 새벽안개처럼잡을 수도, 붙들 수도 없는 그리움으로.너를 만났던 날의 하늘은하얗게 날아가고,떨어져 남는 것은 그저 나였다.그대의 발자국 사이마다내가 걸려 있음을 아는가.한겨울의 찬 칼바람이 뼛속을 쓸어가도꽃샘바람의 아린 추위에 더 몸서리치듯너의 뒷모습은그리움의 아픈 칼끝이었다.떨어진다.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눈 속의 하늘,거기서 비추는 너의 뒷모습이짧은 순간 그림자처럼 내 마음에 새겨졌다.지워지지 않는 멍처럼,사라질 수 없는 흔적처럼.그리움이란 이름의 칼끝이봄의 살결마저 헤집을 때,나는 너를 향해 내민 손끝에서작은 겨울을 발견한다.그 겨울은 네가 없는 계절들 속에서만온전히 꽃 피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어느 계절의 끝자락엔가잊힌 것처럼 잔잔히 누웠던 들판에서,한..
막차와 첫차 밤은 끝나지 않았다.비는 어둠을 헤집으며 스며들었고,나는 시간이 멈춘 정류장에 서 있었다.발걸음과 망각 사이의 경계가 어렴풋이 드리워졌다.발끝에 고인 웅덩이는 달빛을 삼키고,낙엽 몇 장이 바람 속에서 마지막 춤을 추고 있었다.저 멀리서 막차가 도착했다.그 질주는 피날레를 알리는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다.슬픔이란 단어를 꺼내기 전,나는 이미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막차는 떠나갔고, 그 떠남의 의미를 헤아리기에는 나의 시간이 모자랐다.너는 없었다.사이렌 소리가 울리고,잃어버린 시간이 응급처치도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나의 눈물은 비와 섞여 발끝으로 사라지고,내 영혼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도언젠가 봄이 올 것이라 믿었다.하지만,그 봄은 오지 않았다.그해 이후, 나의 계절은 한밤중에 갇혔고,꿈은 낡은 영화 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