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물 위에 조용히 돌 하나를 떨어뜨리면, 파문이 번진다.동그란 물결은 고요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퍼져 나가다 이내 사라진다.햇살 아래 반짝이며 멀어져가는 그 잔물결은 어느 순간 흔적 없이 물속에 스며들고, 그렇게 자연은 자신의 흔적마저도 부드럽게 지운다.그러나 인간 사회의 파문은 다르다. 특히 말에서 비롯된 파문은, 물결이 아니라 칼날이 된다. 그것은 부드럽게 다가와 마음을 꿰뚫고, 믿음을 갈라놓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물 위의 파문은 빛을 품지만, 말의 파문은 때로 어둠을 잉태한다. 진실과 거짓, 정의와 욕망이 섞인 그 어휘의 물결은, 사라지지 않고 앙금으로 남는다. 말은 울림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어떤 이는 떨게 하고, 어떤 이는 따르게 만든다.말은 물보다 무겁다.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
늦은 오후의 고백
오래전, 어머니의 조용한 전화 목소리.“너 요즘은 전화도 뜸하더라.”툭 던지신 그 이야기가, 마치 오래된 돌담에 난 미세한 금처럼 마음을 스르륵 긁고 지나갔다.나는 익숙한 웃음으로 둘러댔다.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그러나 내 마음의 깊은 곳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 짧은 말은 다만,“아들이 보고 싶다”라는가장 길고 애틋한 고백이었다는 것을.사람은 늘사랑도, 미안함도, 고마움도 너무 늦게 해독한다.삶이란, 무엇을 잃고 나서야조금씩 투명해지는 창 같아서,그제야 우리는 마음을 들여다본다.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셨을 때, 나는 그분의 이마에 손 한번 얹지 못했다.엄했던 분, 가까이 가면 날카롭게 다칠 것 같던 거리감.내가 어색해서, 서툴러서.결국, 다정한 말 한마디 못 건넨 채 스르륵 커튼을 닫고 말았..
씨앗의 꿈
바람이 무심히 흘려보낸 흙 한 줌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씨앗 하나가 있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손끝에 닿으면 부서질 듯 연약한 그 조각은 세상의 어떤 위대한 존재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꿈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곧장 피어나지 않았고, 날개도 없었으며, 소리 한 줄기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태초의 별빛을 응축한 것처럼 하나의 세계가 고요히 웅크리고 있었다.미국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아 나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 거목의 시작은, 놀랍게도 손톱보다 작은 씨앗 하나다. 겨우 3그램 남짓의 무게로 수천 년을 견디며, 뿌리를 대지에 박고, 하늘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멈춤 없이 자란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몸체, 수천 개의 계절을 견딘 껍질,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는 뿌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