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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유혹 처음이었다.도서관 한쪽 편, 형광등 불빛 아래서새벽을 견디던 어느 밤.텅 빈 정적 속, 잠들었던 신경세포들이슬며시 깨어나는 듯했다.입술에 닿는 온기,혀끝을 감싸며 퍼지던 씁쓸한 쾌락그 순간, 감각은 세차게 일렁였고세상의 소음은 마치 유리창을 닦은 듯 선명해졌다.무뎌졌던 문장이 별빛처럼 반짝였고단어들은 하나의 악보처럼질서 있는 흐름으로 읽혔다.그건, 유혹이었다. 작고 검은 유혹.커피라는 이름의 마법.그것은 내게 ‘집중’이라는 신기루를 선물했다.하지만 모든 유혹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그날 이후, 나는 커피를 기억했다.하루의 시작은 늘 그 한 잔으로 열렸고처음엔 일을 위한 동료였던 그것이어느새 일상 속의 숨결이 되었으며,그 일상은 조용한 중독으로 나를 침범했다.나는 묻는다.이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일까?각..
얼굴 거울은 언제나 정직하다. 하지만 정직함이 진실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매일 아침, 낯익은 얼굴과 마주하지만그 얼굴은 내가 원하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콧날의 선명함이나 턱선의 날렵함보다더 근원적인 무언가가 얼굴을 이루는데,세상은 자꾸만 겉모습에 관심을 둔다. “인상이 좋으시네요.”“선해 보이세요.”“호감 가는 얼굴이에요.”이 말들은 겉으로는 가볍지만,그 안에 담긴 무게는 종종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반사하는 창이며,우리가 거기에 얼마나 많은 것을 걸어두는지우리는 때때로 잊는다.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는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전 한 문학 강의에서 만난 노교수는 주름진 얼굴에 늘 낡은 셔츠를 걸치고 다녔다. 눈빛은 흐릿하고, 말투는 더뎠다. 사람..
파문 물 위에 조용히 돌 하나를 떨어뜨리면, 파문이 번진다.동그란 물결은 고요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퍼져 나가다 이내 사라진다.햇살 아래 반짝이며 멀어져가는 그 잔물결은 어느 순간 흔적 없이 물속에 스며들고, 그렇게 자연은 자신의 흔적마저도 부드럽게 지운다.그러나 인간 사회의 파문은 다르다. 특히 말에서 비롯된 파문은, 물결이 아니라 칼날이 된다. 그것은 부드럽게 다가와 마음을 꿰뚫고, 믿음을 갈라놓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물 위의 파문은 빛을 품지만, 말의 파문은 때로 어둠을 잉태한다. 진실과 거짓, 정의와 욕망이 섞인 그 어휘의 물결은, 사라지지 않고 앙금으로 남는다. 말은 울림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어떤 이는 떨게 하고, 어떤 이는 따르게 만든다.말은 물보다 무겁다.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
흐름 시간은 강물처럼 나를 지나쳤다. 한때는 거침없이 흐르는 물살을 타고 노를 저으며 삶의 미로를 가로질렀고, 또 한때는 바위처럼 한자리에 앉아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종이로 된 사진첩을 디지털 앨범으로 옮겨놓았고, 잉크 냄새 짙던 편지는 이제 화면 위의 텍스트로 바뀌었다.나는 아날로그로 태어났다. 연필과 지우개, 필름 카메라 전화기를 돌리던 둥근 손맛을 기억하는 시대. 원고지에 한 글자씩 눌러쓰던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아직 종이 위에 향기를 품은 채 남아 있다. 잉크가 번진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면, 어린 날의 내가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낯설지만 다정한 눈빛으로.기억은 이제 클라우드에 저장되고, 감정은 이모티콘으로 전달된다. 흐름은 기술의 이름으로 내 삶을 재구성했다. 예전에는..
빛의 가장자리에서 쓰는 글 이름이 생기기 전의 새벽도 존재했다.해가 뜨기 전의 그 고요한 청명, 별빛이 오히려 선명히 살아 숨 쉬는 그 시간.무명작가의 삶이란 바로 그러하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찬란히 존재하는 이들.무명은 무지와 다르다.어느 무명작가가 가진 언어와 문장은, 종종 독자의 가슴을 울릴 만큼 예리하고 섬세하다. 단지 그 글이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하늘의 별이 되어 있을 때,그는 바다 밑에서 빛나는 물고기로 살았다.하늘과 바다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진 이름들. 그것은 실력의 틈이 아니라, 운과 시기의 틈이기도 하였다.나는 오래전 한 행사에서,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은 한 노작가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이미 고인이 된 그 작가는, 단 한 권의 책만 출간한 채 문단에 발을 디딘 적 없는 무명이었지만,..
늦은 오후의 고백 오래전, 어머니의 조용한 전화 목소리.“너 요즘은 전화도 뜸하더라.”툭 던지신 그 이야기가, 마치 오래된 돌담에 난 미세한 금처럼 마음을 스르륵 긁고 지나갔다.나는 익숙한 웃음으로 둘러댔다.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그러나 내 마음의 깊은 곳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 짧은 말은 다만,“아들이 보고 싶다”라는가장 길고 애틋한 고백이었다는 것을.사람은 늘사랑도, 미안함도, 고마움도 너무 늦게 해독한다.삶이란, 무엇을 잃고 나서야조금씩 투명해지는 창 같아서,그제야 우리는 마음을 들여다본다.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셨을 때, 나는 그분의 이마에 손 한번 얹지 못했다.엄했던 분, 가까이 가면 날카롭게 다칠 것 같던 거리감.내가 어색해서, 서툴러서.결국, 다정한 말 한마디 못 건넨 채 스르륵 커튼을 닫고 말았..
흐려서 좋고 맑아서 또 좋다 맑은 날에는 세상이 창을 활짝 연 듯하다. 빛은 무게가 없는 데도 마음 한가득 밀려와숨결마저 일렁이게 한다.햇살은 대수롭지 않게 창턱을 넘고, 나뭇잎 사이를 유영하며, 손등 위에 포개진다. 그 미묘한 온기를 느낄 때마다 나는 ‘삶’이라는 단어가맑고 얇게, 마치 물방울처럼 손끝에 맺히는 걸 느낀다.투명하게 반짝이는 오후,공원에선 아이들이 웃음으로 뛰놀고,거리의 소음조차 생명의 리듬처럼 들린다.‘생명’이 얼마나 눈부신 말인가.얼마나 환한 자음과 맑은 모음으로 빚어진 것인가.그런 날이면, 외출을 미루지 못한다.걸음은 경쾌해지고,마음은 공중으로 들려올라어릴 적 종이비행기를 접던 기억처럼 설렌다.햇빛은 감정을 덮어버리기도 한다.모든 것이 반짝이는 날에는눈물조차 무색해지기 때문이다.풀잎 위 이슬은 조용히 떨리고,창..
씨앗의 꿈 바람이 무심히 흘려보낸 흙 한 줌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씨앗 하나가 있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손끝에 닿으면 부서질 듯 연약한 그 조각은 세상의 어떤 위대한 존재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꿈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곧장 피어나지 않았고, 날개도 없었으며, 소리 한 줄기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태초의 별빛을 응축한 것처럼 하나의 세계가 고요히 웅크리고 있었다.미국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아 나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 거목의 시작은, 놀랍게도 손톱보다 작은 씨앗 하나다. 겨우 3그램 남짓의 무게로 수천 년을 견디며, 뿌리를 대지에 박고, 하늘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멈춤 없이 자란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몸체, 수천 개의 계절을 견딘 껍질,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는 뿌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