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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글씨 사이 나의 중학교 시절 교과 과목 중에 한문 과목이 있었고 서예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얇은 먹물이 반들거리는 화선지 위에 스며들며 번져 나가던 그 모양은 마치 숨결 같았다. 획 하나에도 숨이 실리고, 점 하나에도 감정이 담겼다. 선생님의 손끝을 따라 내 손이 움직이던 그 순간, 나는 ‘글씨’를 배웠다. 하지만 오래도록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글을 쓰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였음을.글씨는 손의 예술이고, 글은 마음의 연금술이다.글씨를 잘 쓰기 위해선 체본이 필요하다. 붓글씨건 펜글씨건, 먼저 스승의 손길로 완성된 모범이 있어야 한다. “가” 자 하나를 쓰는 데도 점의 시작과 끝, 붓의 누름과 떼는 호흡을 익혀야 한다. 그건 마치 고요한 연못 위에 잔잔히 물결을 띄우는 일 같다. 반듯한 글씨는 곧은 심지를 ..
돌아보는 삶 이른 아침, 창밖에서 흘러든 여자아이의 맑은 웃음소리에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본다.어떻게 저토록 예쁘고 새뜻할 수 있을까.세상의 무게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그 아이는 자기 마음을 세상의 소음보다 더 조용히 들어보았기 때문이리라.나는 종종 세상을 탓했다. 인연을 탓하고, 어긋난 운명을 한탄하며, 나 아닌 모든 것을 원인으로 지목 해왔다. 그러나 그 모든 탓의 근원은 결국 내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조용히 인정하게 된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것은, 내 안의 욕심이었고, 어둠이 덮치지 않아도 길을 잃은 것은 내 내면의 혼란 때문이었다.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미소를 아껴 쓰고, 다정함을 마치 귀한 금처럼 ..
예의와 존경, 그리고 굴욕의 풍경 아침 8시 42분, 지하철역 개찰구 앞에서 뒤꿈치가 마모된 검정 구두를 신고허둥지둥 뛰는 사내 하나. 목덜미에 땀이 밴 셔츠 깃은 어제의 퇴근 냄새를 간직한 채 고개를 숙이고 뛴다.사내의 손에는 카페 로고가 선명한 한 잔의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고, 그의 눈빛은 커피보다 더 진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오늘도 그 인간이 먼저 출근했을까 봐.엘리베이터 앞, 19층 버튼을 누르기 전 그는 숨을 한번 삼켰다.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허리를 반쯤 꺾은 채로, 거의 절 가까운 인사를 하며 사무실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이 지긋한 부장이 슬그머니 머리를 돌렸다. 고개는 돌렸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단단히 굽혀진 채였다.요즘 세상은 ‘존경’이란 말을 과하게 소비한다. 그러나 정작 그 존경은..
몸의 하소연 어느 날,내 몸이 낯선 옷을 입은 듯익숙한 나를 비켜서기 시작했다.주인의 허락도 없이,콧물이 맥없이 떨어졌다.마치 무언가 오래 눌러 참은 감정이슬며시 흘러나오는 듯이.그렇게 문득, 감기가 찾아왔다.계절의 짓궂은 장난쯤으로 여겼다.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스쳐 가리라 믿었다.하지만 목의 통증과 함께 기침을 시작했다.예고도 없이 병은 찾아든다.높지 않은 열에도 몸은 균열을 일으켰다.몸은 메마른 땅처럼 금이 가고손끝은 내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사막의 갈라진 모래처럼살결이 내게서 벗어나는 기분.몸이 아플 때, 시간도 병을 앓는다.느리게, 조용히, 나를 쓰다듬듯 흐른다.눈꺼풀은 철심처럼 무거워지고, 이불은 거친 갑옷이 되어 나를 감싼다.이상하다,몸이 아프면 마음이 먼저 외로움으로 젖어 든다.열꽃처럼 번지는 고독..
말의 무게 병원 복도는 늘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정적 사이를 오가며, 시간마저 숨을 죽인 듯 조용하다. 낡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희망 같기도, 체념 같기도 했다. 병상에 누운 한 남자가 있었다. 폐암 말기 환자였다. 숨을 쉴 때마다 들쑥날쑥한 가슴의 오르내림이 마치 꺼져가는 등불처럼 아슬아슬했다. 최근 그의 병실에 두 명의 의사가 시간차를 두고 방문했다.첫 번째 의사는 차가운 정밀 기계처럼 다가왔다. 얼굴은 무표정했고, 말투는 모래처럼 거칠고 건조했다.“암이 뇌까지 전이됐습니다. 통증은 점점 심해질 거고… 수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필요한 처치는 하겠습니다.”차갑고 냉정한 말, 그 안에는 위로도, 온기도 없었다. 그 말은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돌덩이처럼 환자의 가슴속에 떨어졌고, 생각은 멈추었고, 마..
낯선 길 낯선 도시의 아침은언제나 이방인의 발걸음에 무심하다.익숙하지 않은 언어, 낯선 얼굴들,생경한 골목의 숨결 위로나는 어제의 꿈을 품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의 먼지,시련은 항상 골목 어귀에 숨어 있다가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비는 예고 없이 옷을 적시며 속삭인다.“돌아갈 곳은 없다.”희망이라는 단어는반쯤 지워진, 오래된 간판처럼 흐려지고,‘버텨야 한다’는 말은 입술 위에선 가볍지만,단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은마치 벼랑 끝에서 걸어가는 일.그러나 바람은 언제나 먼 곳에서 불어오지 않던가.기억 저편, 고향의 푸른 들판처럼희망은 마음의 언덕 뒤 어딘가에조용히 웅크리고 있다.쓰러진 날들 위에 피어난“조금만 더”라는 그 조용한 의지 하나가얼마나 큰길을 열어주는지 나는 안다.그 미약한 떨림이세상을 ..
사랑의 발걸음 기다려 줘 내가 달려갈게.운전은 내 몫이야.사랑은 늘 그렇게,먼저 걷는 발걸음에서 시작되는 거니까.누군가를 향해 나아가는 그 길 위에서바람 한 자락도,당신의 어깨를 스치게 하고 싶지 않아.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줘.내가 달려가고 있는 시간에당신은 책 한 장을 넘기며 날 생각해 줘.그 안의 글귀가 당신에게 속삭이며 말을 걸듯.따뜻한 차 한 모금, 그 여운이 남은 동안나는 바람을 타고,스치는 도로변의 모든 풍경을당신에게 전해줄 선물처럼 품고 달릴 거야.찻잔을 비울 때쯤 창밖을 내려다보면내가 보일 거야.마치 봄이 눈앞에 피어나는 순간처럼,따뜻한 눈빛으로, 그렇게 어김없이.만나면 우리기억의 조각들이 흩뿌려진 곳으로 가자.사랑 영화 속 주인공처럼서로에게 감정의 대사를 남기며.가슴이 뻥 뚫리는 바닷가.하늘이 ..
현의 떨림 요즘은 프란시스코 타레가와 페르난도 소르 같은 기타의 거장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FM 라디오에서는 고전 기타 음악 특집이 자주 방송되고, 나는 처음으로 아구스틴 바리오스의 곡도 들을 수 있었다. 백 년이 넘은 옛 음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여전히 감동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타레가나 소르는 고전 기타 음악의 기초를 다진 인물들이다. 타레가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기타를 위해 헌신했고, 소르는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연주와 작곡을 이어갔다. 두 사람 모두 내면이 섬세하고 고독한 예술가였다. 기타라는 악기는 그들의 손에서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흘러나오게 했다.이들은 삶의 고통과 외로움을 선율로 바꾸어냈고, 그 음악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해 준다. 그들의 곡은 작고 소박하지만,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