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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손때묻은 것들

말 없는 저녁의 색깔은
오래된 반추를 닮아 있었다.
창문 너머
희미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내 안에서 무언가 부드럽고도
낯선 음조로 속삭였다.
그것은 찬 바람이 아닌,
몸에 익은 체온 같은 것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오래된 열쇠 하나를 꺼냈다.
차갑고 무겁던 기억의 조각들,
날카로웠던 시간을 어루만지며
문득 깨달았다.
이 열쇠는 아픈 것들을 품어낸
시간의 도구였다.
닫힌 문은 없었다.
그저 이 열쇠를 돌리는 행위로
내가 하나의 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의 손끝에 익은 슬픔은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부드러운 울음이거나,
낮은 웃음이었다.
슬픔은 반지처럼
내 손가락에 끼워져 반짝였다.
빛이 길을 비추는 순간,
그 반지 속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그때의 나였다.
상처 속에 감추어진 빛줄기.

세상은 나를 둘러싸며
낮은 속삭임으로 말했다.
“네가 발 디딘 고통들은
오래도록 너의 것일 것이다.
네가 손때를 묻히고, 무늬를 새기고,
그 속에서 네 이름을 찾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네 짐이 아니라
네 일부가 될 것이다.”

나는 문밖의 낡은 구두를 보았다.
낯선 도시의 먼지와 나뭇잎 조각이
그 표면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 구두에 자리 잡은 순간,
더는 낯설지 않았다.
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불편하고 거친 것들마저도.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픔을 오래 매만진다는 것은,
그 아픔에 이름을 붙이고 다듬는 일이다.
각진 모서리들이 닳아 없어지고,
날카로운 부분들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렇게 다듬어진 괴로움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온 나날의 증거였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비출 힘이었다.

이해했다.
우리가 가장 멀리 두고 싶었던 것들이,
결국 우리를 붙잡아 일으키는
힘이 된다는 것을.
그렇게, 모든 것은 내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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