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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다는 건 길들여진다는 건어떤 모양으로든시간과 손끝이 스며든다는 것.뾰족하던 돌이파도의 입맞춤에 둥글어지고,가시에 찔리던 손이장미의 향을 기억하게 되는 일.어린 사슴의 겁먹은 눈빛도마침내 손바닥을 허락하고,눈밭에 새긴 발자국도녹아 흐르며 흙에 스민다.길들여진다는 건반쯤 접힌 마음을다 펼치며 바라보는 것.날카로운 것들이 닳아 없어지고부드러운 것들로 대신 채우는 것.그래서 삶은,길들여져가는 매 순간마다조금씩 노래가 된다.낡은 기타의 줄처럼,때로는 아프게 떨리며그러나 결국엔자신만의 음을 찾는다.길들여진다,그것은 단지 굴복이 아니라배움이자 수용이고,마침내 조용히 물든한 폭의 풍경이 되는 일.그 길 끝에서 우리는언젠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아, 이 삶이 내 것이었구나."
피에로 그는 무대 위에서 웃음의 화신이었다.붉은 코는 세상의 중심 같았고,얼굴을 가득 채운 하얀 분장은 마음의 지도 같았다.박수 소리와 환호는 폭우처럼 그를 뒤덮었지만,그 소리가 사라진 밤, 거울 앞에 서면그의 표정은 돌이 된 듯 굳었다.거울 속 얼굴이 말을 걸었다."오늘은 몇 명의 눈물을 훔쳤지?"피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눈꺼풀 속에 감춘 슬픔이 소리 없이 대답했을 뿐.거울 속의 그는, 무대 위에서웃음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처럼 보였다.그러나 그의 진정한 얼굴은거울 속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그의 집은 거울 조각으로 만든 성이었다.거울 조각마다 자신의 다른 얼굴을 담고 있었다.웃는 얼굴, 우는 얼굴, 분노하는 얼굴,그리고 아무 감정 없는 텅 빈 얼굴.거울을 쓸어내릴 때마다손끝에는 칼날 같은 진실이 ..
나무와 숲 나무는 서로 등을 돌린 채흙 위에 뿌리를 내리고저마다의 그림자를길게, 혹은 짧게 드리운다.잎 하나는 바람을 모으고,또 다른 잎은 태양을 마신다.모든 것은 다르게 태어난다.그럼에도 숲이었다.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울어도,침묵의 몸짓으로 흔들려도결국 하나의 숨결로 이어진다.오늘, 길거리에서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을 보았다.모습들은 다 저마다의 빛깔을 가졌지만,그 빛깔들은 서로 동화 되지 못한다.어느 하나의 색도 숲이 되지 못했다.우리는 묻는다.왜 사람은 숲이 될 수 없는가?왜 서로의 뿌리를 외면한 채바람을 흩어버리는가?숲은 나무가 서 있는 곳이 아니라나무가 서로를 기억하는 곳이다.그대와 내가 숲이 되려면먼저 서로의 고독을 기억해야 한다.그리하여 우리의 침묵이또 하나의 나무가 되고 또 하나의 나무가 되어새로운 숲의..
그림자의 바다 어둠은 바다였다.별 하나 없는 검푸른 물결 위에고요는 천으로 깔린 듯 누웠다.그곳에 서 있는 나무,뿌리는 달빛을 삼키며몸통은 오래된 비밀을 안고 있었다.가지 끝마다 걸린 작은 종,울리지 않는 소리를 쥔 채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바람의 손가락이종의 입술을 스쳤다.아무도 듣지 못할 멜로디가공기 속에 흩어지고,한 겹, 두 겹그림자가 찢겨 나갔다.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그 아래엔 아무도 없었다.나는 그곳에서부서진 바다를 건너려 했다.몸을 내던질 때마다그림자는 뿌옇게 흩어졌고,손에 쥔 것은 무언가의 부재였다.아침이 오면그림자는 말라붙어 사라질 것이다.그러나 그 밤,나는 그 바다를 다시 찾을 것이다.빛과 어둠 사이의 경계에서파도는 여전히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눈 내리는 저녁 눈 내리는 저녁, 해묵은 달이 바람의 발끝을 쓸고 갈 때, 잿빛 날개를 접은 새가 어둠 속에 길을 묻는다.그대는 어디쯤인가. 시간의 강을 건너 빛과 어둠 사이에 갇힌 한 점 별처럼 떨어지지 않는 대답을 품은 채.여기, 나는 부서지는 눈송이 위에 떠 있다. 말라가는 강바닥에 한 줌 눈을 심으며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잇는 순간을 기다린다.흩어진 잎새가 속삭이듯, 그대는 내게 다가와 눈을 감은 나무의 숨결로 머문다. 나는 안다. 그대의 침묵은 잃어버린 것들의 울음이라는 것을.결국, 우리는 잃어가는 것들 속에서 가장 깊은 뿌리를 찾는다. 그곳에서 그대와 나는 서로를 녹이는 눈발이 되고, 서로를 비추는 별빛이 된다.그리고 보라, 우리의 이름 없는 몸부림들이 서서히 하나의 노래가 될 때 이제, 누구도 우리를 잃었..
밤에 그늘은 이름을 잃은 기억의 가장자리에서 흔들렸다.누군가 걸어 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은,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한 음씩 흘려보내는비어 있는 선율이었다.당신을 부르던 소리는바람처럼 사라졌다.이제는 한 줌의 침묵이 겨울의 숨결을 삼키며,마치 투명한 언어처럼 당신의 이름을 적는다.손끝이 가리킨 방향에는 언덕이 있었고,그 언덕 너머엔 늘 끝이 안 보이는 곳이었다.빛은 당신을 모서리로 몰아넣었고,그곳에서 당신은 별의 형상을 빌려 도망쳤다.별이 된다는 건 닿을 수 없는 약속이 되는 것.나는 당신의 그림자를 따라갔지만,발밑에는 자꾸 다른 그림자들만 겹쳤다.밤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내 주머니에 스며들었다.한 겹, 두 겹. 밤은 다르게 생긴 기다림을겹겹이 쌓아 올렸다.그 기다림의 끝은 당신일까? 아니면, 당신이 부재한 시..
사는 것은 아픔을 품는 시간 가난한 별빛 아래, 한 여자가 허리를 낮춘다. 그녀의 등허리는 오래된 산맥처럼 굽어 있고, 그 골짜기에는 바람이 스친다. 흙냄새와 피로의 흔적이 어린 손끝으로 찢긴 삶을 헤아려본다. 침을 꽂는 의사는 묻지 않는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아프다는 것을 안다.아픔은 그녀의 몸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와 같다. 매일 아침, 피곤이라는 새가 그 나무에 앉아 울고, 저녁에는 서늘한 어둠이 가지를 감싼다. 그러나 그 나무는 자란다. 아픔은 나무를 키우는 토양이다.젊은 날 그녀의 가슴속에는 한때 사랑이라는 불길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소진되지 않은 채, 여전히 타오르는 화산이 되었다. 그 화산은 한때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켰지만, 이제는 조용히 내뿜는 연기만으로도 그녀를 지탱한다. 사랑은 아픔으로 변..
체포와 구속 그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히며 들려온 소리는 구속의 서막 같았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광경. 높이 솟은 심판대와 차디찬 바닥의 무늬까지도 어딘가 내 안의 기억을 훔쳐본 듯했다.“피고인, 당신은 스스로 이곳에 출두한 죄를 인정합니까?”목소리는 공간의 중심에서 흘러나왔으나,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답할 수 없었다. 답이 무엇인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당신은 눈길 하나로 한 영혼을 전복시키고, 숨결 하나로 수많은 밤을 뒤흔들었습니다. 변명할 기회를 드리죠.”나는 침묵했다.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이름만 맴돌았다. 내가 이곳에 선 이유, 모든 시작의 불씨.그들이 증거라며 내미는 것은 낯선 장면들이었다. 당신의 손길이 머문 자리에 새겨진 깊은 흔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