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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과 가까운 곳의 미학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안개가 내려앉은 산봉우리, 저녁노을에 물든 바다,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도시의 불빛.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풍경은 거칠어진다. 바람에 깎인 바위의 상처, 물결에 부서진 파도의 흔적, 도시의 화려한 불빛 아래 어둠에 갇힌 골목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멀리서 동경한다.완벽한 얼굴선과 우아한 몸짓, 흠결 없는 태도를 가진 듯 보이는 사람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매끈해 보이던 얼굴에 미세한 주름이 있고, 조화롭던 말투에도 날 선 모서리가 있다.이상적인 여성상이라는 환상도 마찬가지다.그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감춰져 있는지,혹은 그것이 애초에 허상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아름다움은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흔들린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야만 보..
모래시계 유리병 속에서 모래가 쏟아지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본다.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또 흐른다. 손가락을 뻗어 모래 한 줌을 움켜쥐면, 알갱이들은 작은 틈을 비집고 흩어져 버린다.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시간의 본질.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모래의 속도를 조급하게 재촉하기 시작했다.처음 모래시계를 만든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시간을 가두려는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흘러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자 했던 것일까. 유리병 속 모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아주 정확한 흐름을 만든다. 마치 한 점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 한 알갱이도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 운명을 지닌 듯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알았을까. 정작 우리가 사는 시간은 그렇게 반듯하고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 날,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손끝이 문고리를 맴돌다 멈춘다. 문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문은 내게 저항한 적이 없다. 닫혀 있는 문이란, 스스로 열지 않는 자에게만 벽이 될 뿐이다.나는 문을 바라본다. 문은 단순한 구조물이다. 나무이거나 쇠붙이거나, 때로는 유리처럼 투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문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경계를 짓고, 구획을 나누고, 안과 밖을 구분한다. 문이 있어 공간은 나뉘고, 세계는 겹을 이룬다. 문이 없다면 어찌 안과 밖을 인식할 수 있을까? 문이 없다면 우리는 길을 나설 수 있을까?문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인간관계를 생각한다. 사람 사이에도 문이 있다. 손쉽게 열리는 문도 있지만, 철벽처럼 굳게 닫힌 문도 있다. 어떤 문은 너무 오래 닫혀 녹슬고 삭아..
몸과 마음,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 몸과 마음은 마치 물과 바람 같다. 물은 형체를 지닌 채 낮은 곳으로 흐르고,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결로 높은 곳을 향한다. 두 존재는 서로 스미고 부딪치면서도 끝끝내 하나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일까. 물처럼 손에 쥘 수 있는 몸일까, 아니면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마음일까.나는 손으로 내 얼굴을 만져본다. 뺨의 온기, 손가락 끝에 닿는 촉감, 거울에 비친 눈동자의 깊이. 나는 분명 여기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몸이 ‘나’라면, 왜 몸이 그대로일 때에도 마음은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기도 하는 것일까. 어떤 날은 환한 햇살 아래에서도 스스로 투명해지는 느낌이 들고, 어떤 날은 어둠 속에서도 마음이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몸이 길을 가면 마음이 그 뒤를 따르는지, 마음이 앞서면 몸이 따라오는..
삶이 얼굴을 바꾼다 사람의 얼굴은 나이테처럼 세월을 새긴다. 날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이마에, 눈가에, 입가에 깊고 얕은 선을 새긴다. 아무리 같은 재료로 빚어졌다 해도, 살아가는 모양에 따라 얼굴은 전혀 다른 조각품이 된다.누구나 얼굴은 처음부터 타고난다. 어떤 얼굴은 빛을 머금고 태어나고, 어떤 얼굴은 그늘을 안고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얼굴은 단지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새롭게 빚어지는 조각상이다. 한 사람의 삶이 그의 얼굴을 조각한다.어떤 이들은 얼굴에 웃음을 새기고, 어떤 이들은 얼굴에 슬픔을 새긴다. 깊은 사색과 진실한 삶을 살아온 얼굴에는 한줄기 맑은 빛이 흐른다. 반면, 불안과 탐욕에 휩싸여 살아온 얼굴에는 어딘가 흐린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것은 화장으로 감출 수도, 값비싼 옷으로 가릴 수도 없는..
외면 어느 날 문득, 외면하는 법을 배웠다.내 곁을 스치는 모든 사람을다 가슴에 품고 손잡아주며 살기엔이미 두 손이 너무 무겁고,마음 한쪽은 오래전부터 허약해져 있었다.귀가 닫힌 것이 아니다.다만, 지나가는 소리를 머물게 하지 않을 뿐.물결처럼 밀려왔다 흩어지는 말들은애써 붙잡지 않아도시간이 가면 저절로 가라앉는다.손이 게을러진 것이 아니다.다만,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하지 않을 뿐.때로는 펴놓은 손바닥 위에햇살이 잠시 머물다 가게 두고,때로는 빈손이 주는 가벼움을 배운다.발이 느려진 것이 아니다.다만, 모든 길을 서둘러 가려 하지 않을 뿐.돌아가도 좋고, 잠시 멈춰도 괜찮다.길가에 핀 작은 들꽃 하나에도머물러 바라볼 이유가 있다면.나는 이제눈으로 바람을 듣고,귀로 꽃잎이 지는 소리를 본다.손끝으로는 시간의 결..
사라진 시간의 잔향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내 눈앞의 시간이 흘러들어온다. 빛이 감각 되어 손끝에 닿고, 세상이 고요히 숨을 죽인다. 카메라는 그 빛을 삼키고, 나는 그 삼킨 빛을 들여다본다.렌즈 속 피사체는 자신을 스스로 의식한다. 어깨가 경직되고, 표정이 잔잔한 파문처럼 굳어간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기를 바라지만, 그 자연스러움조차 연출된 몸짓이 된다. 나는 기다린다. 억지웃음이 사라지고, 카메라를 잊은 채 익숙한 자신이 되는 순간을.기다림 끝에 포착된 얼굴에는 빛이 고여 있다. 해가 질 녘 창문에 맺히는 황금빛 얼룩처럼, 순간의 감정이 사진 위에 흔적으로 남는다. 그것은 슬픔일 수도, 기쁨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일지도 모른다.나는 그 감정을 채집하는 사람이다. 렌즈로 영혼을 포획하려 할 때마다, 나..
시간과 흔적 시간이 지나간 자리내 오래된 책장에는 빛바랜 시집 한 권이 놓여 있다. 책장을 넘기면 푸석한 종이 결 사이로 지난 시간이 켜켜이 묻어난다. 몇 번이나 손길을 탄 탓인지 모서리는 닳아 있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누군가의 사색이 배어 있다.나는 이 책을 언제부터 간직하고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선명한 순간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책을 펼칠 때마다 종이에서 희미한 꽃향기가 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마도 과거의 어느 날, 이 책을 품에 안고 들판을 걸었거나, 창가에 두고 빗소리를 들으며 읽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책을 펼쳐도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한때 눌려 있던 들꽃 한 송이가 바삭한 모습으로 발견될 뿐이다. 아마도 누군가 책갈피에 끼워두고 한동안 잊어버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