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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골방 햇살이 길게 누워 있는 오후, 나는 조용히 골방의 문을 연다. 기척조차 없이 열리는 그 순간, 세상의 소음은 가벼운 먼지처럼 가라앉는다. 나는 이 작은 방 안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누추하지만 묵직한 침묵으로 나를 끌어안아 주는 이곳, 나만의 은하계. 나는 이곳을 ‘꿈꾸는 골방’이라 부른다.골방은 내 마음의 퇴적층이다. 무수한 사유의 침전물이 쌓이고, 감정의 휘발이 응결되어 작은 결정으로 남는다. 벽에 기대앉아 있으면 시간도 숨을 죽인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조차 조심스레 내려앉아 내 어지러운 마음을 천천히 덮는다. 이곳은 나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나를 위로한다. 서두르지 않고, 재촉하지 않으며, 자신을 스스로 꺼내어 보도록 유도한다.단단히 조였던 생각의 고리를 천천히 풀..
그리움은 늘 늦게 배운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여겼다.아침의 커피 향처럼,창가에 부서지는 햇살처럼,바쁜 하루의 틈바구니에서도잠깐만 눈길 주면 닿을 곳에.그녀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여겼다.나는 그녀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었다.말없이 곁에 앉아주던 그녀가내 어깨를 스치며 전하던 온기를나는 익숙한 공기쯤으로 여겼다.무심한 나의 침묵 속에그녀는 어쩌면 천천히,말 없는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문자 하나에 담긴 그리움을 모르는 체하고눈빛에 깃든 간절함을 못 본 체하고그녀의 눈빛이조금씩 저물어가는 줄도 모르고잠시만, 다음에, 이따가.이런 대답에 그녀의 시간은 기다림 속에서 조용히 녹슬어 갔다.그 온기를 잊고 있던 건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숨결처럼, 그림자처럼당연하게 여겨졌던 존재는사라지고 나서야 ..
함께 살아가는 것 겨울은 언제나 가장 먼저, 가난한 자의 어깨에 내려앉는다.바람은 무딘 칼이 되어 살을 벤다.사람들의 시선은 모서리를 돌아, 그들을 외면하고 스쳐 지나간다.거리는 따뜻한 집의 반대편에 있다.벽돌로 세운 집이 아닌,지하도, 역사, 공원의 후미진 곳에이름도, 존엄도 지워진 절망하는 이들이 산다.그곳에서 사람은 사람이 아닌 듯 살아간다.여러 해 전 겨울, 노숙인 급식 봉사를 나갔다. 패딩을 껴입고 손에 국자를 들고서, 얼어붙은 그들의 눈동자와 마주했다.추위를 이기려는 듯 어깨를 웅크리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낡고 허름한 옷 속에 웅크린 삶들은 말이 없었고, 눈빛은 대체로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차디찬 바닥 위, 종이상자를 겹겹이 쌓아 만든 자리.그 위에 그는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앉아..
염치를 잃은 사회 염치는 얼굴이다. 누군가를 만나 눈을 맞출 수 있는 최소한의 용기이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얼굴을 붉힐 줄 아는 마지막 인간다움이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이 얼굴을 잃었다. 거울 앞에서조차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염치불고(廉恥不顧)의 시대를 살고 있다.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진다. 정치권은 말의 성찬을 벌이되, 책임은 없는 잔칫상을 차린다.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아도, 그들은 입을 맞춰 궤변을 내뱉는다. 마치 거울 없는 방에서만 살아온 사람처럼, 자신을 비추는 반성의 기미조차 없다.그들에게 '염치'란 한때 국어 교과서에만 등장하던 단어쯤일까. 불편한 진실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무책임은 우리 모두의 매일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아는가? 권력은 책무의 다른 이름이..
저녁 무렵 해는 산등성이를 따라유려한 비단처럼 사뿐히 미끄러진다.그 마지막 숨결은금실로 짜인 빛의 옷자락이 되어세상의 가장자리,하루의 어깨 위에 고요히 내려앉는다.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은이름 모를 그리움의 안부처럼귓가를 스치며 속삭인다.풀잎 끝에 맺힌 투명한 이슬은말없이 흘러간 시간이 남긴가장 순결한 편지 한 조각.빛과 어둠 사이,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잠시의 틈.그 틈새에선 오래 기다린 마음 하나바람의 발자국처럼 머문다.노을의 붉음이 천천히 하늘을 물들일 때,아직 닿지 못한 마음들이파문처럼 번져간다.그 붉음은 언어보다 깊고,그 침묵은 사랑처럼 아릿하다.이 순간은,지나간 것들과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서로를 그리워하며 마주 보는 자리.잊었다 믿었던 감정이문득 고요를 흔들고,텅 빈 벤치 위엔누군가의 이름이 살포시 내려앉..
어느 여름 닮은 봄날의 진동 한 줌 바람이 쨍쨍한 햇살을 식혀주던여름 닮은 봄날,무심히 깔린 오후의 평화 속에서찻잔 속 잔물결처럼갑자기 내 마음이 진동을 한다.조용한 숨결 같던 나의 오래된 고요를 깨웠다.의도하지 않은 틈에서 말없이 들어와모든 것을 부드럽게 무너뜨린다.내 마음은 책처럼 얇은 종이였지만,그 위를 지나가는 그녀의 말 한마디가촉촉한 잉크처럼 스며들었다.이름도 쓰지 못한 감정이그 자리에서 자라기 시작했다.우리는 사랑을 계획한다,처음엔 정해진 노선을 따라걷는 줄 알았다.하지만 마음은 지도 없는 여행자,길 위의 햇살 한 점에도머무를 줄 알고,낯선 눈빛 하나에생의 궤도를 틀 줄 안다.저녁 냄비에서 피어나는 찌개 냄새처럼,갑작스레 피어난 감정이사소한 일상을 덮을 때가 있다.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사랑은 번갯불이 아니라,마치 오래된..
폭싹 속았수다 잔잔한 파도가 제주 바다를 어루만지는 듯한 소리에 이끌려, 나는 조용히 화면 앞에 앉았다. 그 속에서 들려오는 건 말이 아닌 숨결이었고, 움직임이 아닌 정서였다. "폭싹 속았수다"그 한마디는 마치 누군가의 인생 전부를 담아내는 무언의 고백처럼 가슴에 내려앉는다.이 드라마는 단순한 스토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숨’이다. 할망이 찻잔에 떨어뜨린 소금 한 알처럼, 삶의 쓴맛과 단맛이 조용히 배어드는 섬세한 비가(悲歌)였다. 시대의 굴곡과 함께 휘청인 청춘들이 있었고, 그들에겐 우리가 잊고 있던 고요한 위엄이 있었다. 대사가 많지 않았어도, 그들의 눈빛은 풍경처럼 깊고 고요했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존재의 중심을 말하고 있었다.가장 인상 깊었던 건, 말보다 무거운 침묵..
가장 깊은 곳에서 뛰는 심장이 있다. 눈으로 닿지 않고, 손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순간마다 쉼 없이 박동하는 심장. 땅이다. 땅은 늘 아래에 있다. 모든 걸 짊어진 채, 말없이 견디는 존재. 건물의 무게도, 인간의 욕망도, 끝없는 변화를 향한 속도도. 누가 그 아래로 내려가 보았던가. 저 심연 속 어둠이 얼마나 단단하고 얼마나 인내심이 깊은지를 아는가.지면 위로 올려다본 마천루는 꼭대기가 안 보일 만큼 높지만, 그 기초를 받치는 땅의 깊이는 그보다 더 헤아릴 수 없이 깊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아무리 촘촘해도, 결국엔 땅이 그 모든 무게를 품는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시간의 풍화에도 쓰러지지 않도록. 땅은 언제나 아래에서 모든 것을 안고 있다. 흙이라는 말이 주는 부드러움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