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86) 썸네일형 리스트형 템포 루바토 하루를 통째로 흘려보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날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나는 걷기 위해 나선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걷기 위해 걷는다.내 안의 소음을 밖의 고요로 바꾸기 위해.발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언젠가처럼 오늘도 그곳 카페에 닿는다. 바다가 유리창을 통해 스며드는, 소리가 아닌 풍경으로 음악을 들려주는 곳.카페까지 걷는 아름다운 해변 길은 내게 작고 조용한 의식이다. 나만의 템포로, 마치 쇼팽이 건반 사이에 숨을 심듯, 나는 걷는다. 그것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루바토"그 템포는 도둑맞은 박자처럼 느리면서도 정직한 내 삶의 리듬이다.삶에서 그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카페는 늘 바다를 향해 몸을 열어둔다.하얗게 빛나는 커튼은 햇살을 걸러주고, 바람은 창.. 자화상 늦은 오후, 조용한 미술관 한편에서나는 한 그림 앞에 발이 묶였다.그것은 자화상이었다.빛과 그림자가 나란히 얼굴 위에 내려앉은,고요하지만 숨죽인 외침 같은 풍경.화가는 자신의 눈동자에조차작은 어둠을 심어 두었다.찰나를 붙든 붓끝에서빛은 오히려 따스했고, 어둠은 더 깊었다.그 둘은 마치 한 인격 안의상반된 목소리처럼 공존하며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그 자화상을 바라보다가나는 문득 내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내 얼굴엔 어떤 빛이,또 어떤 그림자가 스며들어 있는가.자화상을 마주하는 일은곧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사실을나는 그제야 깨달았다.한쪽은 밝고 또렷하되,다른 한쪽은 어둠 속에 잠긴 눈동자.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 앞에서나는 눈길을 피했다.그는 왜 자신의 얼굴을 갈랐을까.빛은 육체의 맑음을.. 소리 그곳엔 물결처럼 밀려오는 소리가 있다. 한낮의 숲을 가로지르며 파문처럼 퍼지는 잎새의 숨소리, 뿌리 깊은 나무의 속삭임, 그리고 먼 하늘 끝에서 쓸어내리는 햇살의 정적마저도. 귀 기울이면 들린다. 삶의 굴곡마다 묻어 있는, 닿지 않지만 흐르는, 파도 같은 소리.바닷가 모래 위를 걷다 보면 규칙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있다. 모래를 쓸고 지나가며 무언가를 털어내는 소리. 밤새 어둠을 끌어안고 앓던 바다가 겨우 새벽을 맞이하며 토해내는 한숨 같은 소리. 그 소리에 내 마음도 습기로 눅눅해진다. 애써 감춰두었던 회한이 툭, 고개를 내민다.살면서 얼마나 많은 파도를 맞았던가. 사정없이 덮쳐오는 감정, 허무, 실망, 미움. 그것들은 한 번쯤은 나를 삼켜버릴 듯 치솟았지만 결국 바다는 늘 그랬듯 이내 잦아들고야 말았다.. 잠 밤이 오면 하루는 천천히 제 무게를 벗는다.그러나 나는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머리를 베개에 얹는 그 일련의 동작이 예전엔 마치 자동문처럼 나를 꿈의 세계로 들여보내곤 했다. 요즘은 다르다. 나는 매일 밤, 여전히 자리에서 분주하다. 오늘이라는 날은 이미 저편으로 물러났건만, 뇌는 마치 마지막 의사결정권자라도 되는 양, 생각과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검열하느라 푸른 조명을 깜빡인다.예전엔 잠이란, 단추만 눌러도 작동하는 전등 같았다. 하루가 가기도 전에, 나는 먼저 잠에 잠식되곤 했다. 피곤이 쏟아지면, 잠은 고요한 마법처럼 나를 삼켜버렸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잠은 문턱에서 망설이고, 나는 그를 기다리는 구애자가 되었다. 몸은 자자고 아우성인데 마음은 깨어 있으라며 등을 민다.. 몰입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노인을 보았다. 손에 쥔 낡은 스마트폰은 오래된 장신구처럼 손끝에 매달려 있었고, 그는 그 작은 화면으로 들어갈 듯 응시하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주위의 소음과 움직임엔 조금도 관심 없이, 그는 철저히 그 안의 세계에 잠겨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인간은 무언가에 빠져들지 않고는이 견딜 수 없는 현실의 틈을온전하게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몰입은 본능이다.그것은 삶을 견디는 방식이며,때로는 자아를 피신시키는 통로다.시인 릴케는“우리의 모든 일은 그리움에서 시작된다.”라고 했지만, 나는 조심스레 덧붙이고 싶다.우리의 모든 중독은 ‘결핍’에서 시작한다고.누구도 온전하지 않은 이 삶의 균열 앞에서,우리는 무엇인가에 빠져들어그 틈새를 메우려 애쓴다.술과 담배, 커피, 사랑, 신념.. 여백이 있는 삶 살아간다는 건 점점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일이라 여겼다. 빠르게, 더 멀리, 더 많이. 도심의 속도에 나를 맞추기 위해 한때는 나를 잊을 만큼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문득 돌아보니, 가장 소중했던 것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 너무 작고 조용해서, 지나치기 쉬웠던 풍경들. 나는 이제서야 그것들을 느끼기 시작하였다.이사를 준비할 때마다 안 입는 옷들을 정리한다.그렇게 몇 번을 정리하니, 옷걸이가 남아돌아 장 안이 거창한 고민 없이도 조화롭다. 단출함은 선택을 단순하게 하고, 단순함은 마음의 군더더기를 말끔히 걷어낸다. 물건이 줄어드니 의외로 시선이 늘어난다.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 역설. 여백이 넓은 그림처럼, 나의 하루도 숨 쉴 틈을 갖게 된.. 검은 유혹 처음이었다.도서관 한쪽 편, 형광등 불빛 아래서새벽을 견디던 어느 밤.텅 빈 정적 속, 잠들었던 신경세포들이슬며시 깨어나는 듯했다.입술에 닿는 온기,혀끝을 감싸며 퍼지던 씁쓸한 쾌락그 순간, 감각은 세차게 일렁였고세상의 소음은 마치 유리창을 닦은 듯 선명해졌다.무뎌졌던 문장이 별빛처럼 반짝였고단어들은 하나의 악보처럼질서 있는 흐름으로 읽혔다.그건, 유혹이었다. 작고 검은 유혹.커피라는 이름의 마법.그것은 내게 ‘집중’이라는 신기루를 선물했다.하지만 모든 유혹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그날 이후, 나는 커피를 기억했다.하루의 시작은 늘 그 한 잔으로 열렸고처음엔 일을 위한 동료였던 그것이어느새 일상 속의 숨결이 되었으며,그 일상은 조용한 중독으로 나를 침범했다.나는 묻는다.이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일까?각.. 얼굴 거울은 언제나 정직하다. 하지만 정직함이 진실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매일 아침, 낯익은 얼굴과 마주하지만그 얼굴은 내가 원하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콧날의 선명함이나 턱선의 날렵함보다더 근원적인 무언가가 얼굴을 이루는데,세상은 자꾸만 겉모습에 관심을 둔다. “인상이 좋으시네요.”“선해 보이세요.”“호감 가는 얼굴이에요.”이 말들은 겉으로는 가볍지만,그 안에 담긴 무게는 종종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반사하는 창이며,우리가 거기에 얼마나 많은 것을 걸어두는지우리는 때때로 잊는다.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는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전 한 문학 강의에서 만난 노교수는 주름진 얼굴에 늘 낡은 셔츠를 걸치고 다녔다. 눈빛은 흐릿하고, 말투는 더뎠다. 사람.. 이전 1 ··· 3 4 5 6 7 8 9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