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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결 고요 속에서 소리를 들었다. 아니, 소리가 고요를 들추어내었다.아침 이슬이 풀잎을 스칠 때 소리는 투명하다. 먼동이 틀 무렵, 첫 새의 지저귐은 맑고 선명하다.밤새 뜬 눈으로 흐르던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풀어놓는 한숨은 길고 부드럽다. 모든 소리는 저마다의 결을 가지고 있다. 투명한 소리, 맑은소리, 부드러운 소리.소리에도 결이 있고, 그 결마다 감촉이 있다.소리는 단순한 파동이 아니다.그것은 존재의 체온이고 감정의 결이다.어떤 소리는 촉촉하고, 어떤 소리는 서늘하다.어떤 소리는 반짝이고, 어떤 소리는 거칠다.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때 비로소 소리는 파동이 아니라 결이 되고, 피부에 스미는 촉감이 된다.서울에서 평생을 사는 동안나는 너무 많은 소리를 잃어버렸다.사람들의 말소..
만나야 할 사람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왔다.손끝을 스치고, 미소를 주고받으며웃음과 대화가 넘실대는 자리에서그렇게 많은 말을 나누었건만,남는 것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선 늘 혼자였다.부산함이 걷힌 저녁 하늘 아래 홀로인 시간.수많은 말들이 스쳐 갔으나,그 어느 것도 가슴에 닿지 않았다.머물지 못한 이야기들, 스며들지 못한 시간 들.남은 것은 오직 공허한 고독뿐.그제야 깨닫는다. 진정 만나야 할 사람은 말이 별로 필요 없는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아니, 어쩌면 이미 내 안에깊숙이 자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넘어고독의 가장자리에서 기다리는 한 사람.소란스러운 하루가 저물고,모든 관계가 희미해진 뒤에도끝끝내 남아 있는, 이름 없는 그리움.대신 바람이 말을 걸고,침묵이 더 많은 것을 들려주는 사이,우리..
불완전과 균형의 조화 어느 날, 한 아이가 자전거를 배운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는 페달을 밟아보지만, 중심이 휘청이고 바퀴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균형을 잡으려 허공을 마구 긁던 손끝이 공기를 움켜쥐지 못하고 덜컥, 넘어지고 만다. 무릎에 생채기가 난다.아이는 울음을 삼키며 다시 안장을 붙잡는다.어느 날, 한 남자가 외줄을 건넌다. 허공 위의 가느다란 줄 위에서 그는 아슬아슬 한 걸음을 뗀다.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허공에 허우적이는 팔을 균형추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무게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너무 앞서도, 너무 뒤처져도 안 된다. 단 한 발의 실수로 전부를 잃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어느 날, 한 여자가 사랑을 한다. 거리를 두었다가, 다가갔다가, 밀고 ..
바다 바다는 단 한 순간도 같은 얼굴을 한 적이 없다. 아침에는 비취색 실크처럼 부드럽다가도, 한낮이 되면 태양의 칼날 아래 은빛 파편을 흩뿌린다. 해가 질 녘에는 불타는 노을을 삼키며 깊고 어두운 고동색으로 가라앉고, 밤이면 달빛을 껴안은 채 검은 비단을 펼친다.그러나 바다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변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 끊임없이 흐르고 일렁이지만,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 완전한 자유. 인간이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바다를 마주할 때마다 가끔은 경외심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끝없는 넓이와 깊이를 지닌 존재이면서도 단 한 방울의 물방울이기도 한 것. 가슴을 열어 무엇이든 품어주지만, 때로는 무자비하게 삼켜버리는 존재. 바다는 인간의 발걸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노랫말의 품격 늦은 저녁,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TV를 켠다. 흥겨운 전주가 흐르고, 익숙한 듯 낯선 가사가 이어진다."한잔해 한잔해 한잔해 갈 때까지 달려보자 한잔해 오늘 밤 (오늘 밤) 너와 내가 (너와 내가) 하나 되어 달려 달려 달려 달려."의미보다는 흥에 기대어 나열된 단어들. 마치 유리구슬이 바닥에 쏟아져 굴러다니듯, 제법 화려하지만, 허공에 흩어진다. 한때 시를 노래하던 이 땅의 가요는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나는 채널을 바꿨다.그리운 노래가 생각났다.“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나뭇잎 떨어지는 가을엔 편지를 하겠다는 가사가스쳐 지나가는 가을날의 풍경과 함께아련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낙엽이 쌓이는 날’이라는 단어 하나로, 바람이..
그것이 사랑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랑이다.떠나온 길 위에 그림자처럼 남아오래도록 부르는 이름 하나.그 울림이 가서 닿기를 바란다면,그것이 사랑이다.어느 날 문득, 바람이 스쳐 갈 때,그 결에 실려 온 낯익은 향기.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바람의 한 조각으로 휘돌아 들 때,그 또한 사랑이다.시간을 거슬러 도착한 시작이 사랑이다.수평선을 오래 바라보다 문득,그 시선 끝에 스며든 잔상이마음속에 깊이 남았다면,그것이야말로 사랑이다.사랑은 닿기 위한 것이 아니다.마음이 먼저 건너가그리움이 되어 부서질지라도,흔적 없이 스며들더라도,그것은 한사코 사랑이다.숨 가쁘던 하루의 끝,문득 올려다본 저녁 하늘이 사랑이다.그곳에 남겨진 비밀 같은 노을빛이,한 사람을 떠올리는 순간,이런 게, 이런 게 어쩔 수 없이 사랑이다.마음이 먼저가 닿..
늙는다는 것 늙는다는 것은 저문 햇살이 산자락을 어루만지는 것.늙는다는 것은시간의 붓끝으로 파문을 그려 넣어 빛이 기울수록 더욱 깊어지는 색채이니.어느 날 거울 속 내 얼굴에물빛 주름이 흐르거든그것이 강물의 주름임을 알리라.긴 세월을 품고도 단 한 번도 흐르길 멈춘 적 없는 강물의 흔적임을.내 손등이 거칠어지고마디마디가 굽어가도그것이 나무의 결임을 알리라.한 계절을 건너 또 한 계절을 살아낸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임을.때로는 낡은 돌담처럼비바람을 맞아도 묵묵히 서서지나가는 새들의 그림자를 품고,때로는 저물녘 들판처럼금빛으로 빛나다가 조용히 어둠을 맞이하리.바람은 불고 꽃잎이 지듯나는 그렇게 늙어가리라.늙음이란 소멸이 아니라 익어감이라는 것을,살아온 날들의 무게를 등에 지고 타는 노을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가리라.
그냥 놔둘 걸 어느 봄날, 정원의 어린나무를 보니삐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곧장 나무 곁으로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줄기가 바람을 따라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었고, 잎사귀는 바람이 불 때마다 한쪽으로만 쏠려 흔들렸다.이대로 두었다간 나중에 크게 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나는 기어이 지지대를 세웠다. 부드러운 천으로 나무를 묶고, 곧게 자라도록 힘을 주어 곧추세웠다. 시간이 지나도 나무는 여전히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언젠가 지지대를 풀어도 스스로 곧게 설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었다.그러나 계절이 몇 번 바뀐 뒤, 지지대를 풀었을 때 나무는 오히려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뿌리는 깊지 않았고, 가지는 바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애초에 바람 따라 몸을 기울이며 자랐야 했을 나무였다. 나 혼자만의 뜻으로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