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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간과 흔적

시간이 지나간 자리

내 오래된 책장에는
빛바랜 시집 한 권이 놓여 있다.
책장을 넘기면 푸석한 종이 결 사이로
지난 시간이 켜켜이 묻어난다.
몇 번이나 손길을 탄 탓인지 모서리는 닳아 있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누군가의 사색이 배어 있다.

나는 이 책을 언제부터 간직하고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선명한 순간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책을 펼칠 때마다 종이에서
희미한 꽃향기가 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마도 과거의 어느 날,
이 책을 품에 안고 들판을 걸었거나,
창가에 두고 빗소리를 들으며
읽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책을 펼쳐도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한때 눌려 있던 들꽃 한 송이가
바삭한 모습으로 발견될 뿐이다.
아마도 누군가 책갈피에 끼워두고
한동안 잊어버렸을 것이다.
꽃은 눌린 채로 시간이 지나면서
색을 잃고 향도 사라졌지만,
그것이 있던 자리만큼은
선명하게 흔적을 남겼다.

소중했던 것들의 흔적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지나치고,
또 잊어버리는가.
그때는 소중하다고 여겼지만,
시간이 흐르면
손에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것들.
마치 계절이 바뀌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들꽃처럼 말이다.

나는 문득,
바람이 스쳐 지나간 들판을 떠올린다.
바람은 무심한 듯 모든 것을 휩쓸고 가지만,
실은 어디론가 작은 씨앗 하나쯤은
데려다 놓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들 또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든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치 시집 한구석에 눌려 있던 들꽃처럼,
혹은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기억처럼.

지나간 것들이 남긴 자리

나는 들꽃을 조심스레 책갈피에서 꺼낸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질 듯
섬세한 꽃잎이 손끝에서 가볍게 떨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또 다른 꽃을 끼워 넣는다.
이 꽃 또한 시간이 지나면 눌리고,
빛을 잃고, 언젠가 잊힐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가 다시 책을 펼칠 때,
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바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지나간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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