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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시간의 정원에 한 그루 나무가 되는 일.햇살이 깎아낸 주름 사이로바람이 길을 내고,비가 스며들어 깊은 뿌리를 키우는 일.나이가 든다는 것은잎이 지는 아쉬움을 품고도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용기.흰 서리가 내려앉아도그 안에 맺힌 빛을 아는 눈.나이가 든다는 것은가끔 추억이 바람처럼 지나가마음 한켠 흔들리더라도그 모든 흔들림이 나를 이루는 결이 되어더 단단한 나를 완성해 가는 일.나이 든다는 것은시간이 내게 남긴 손 편지를 펼쳐한 글자, 한 글자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며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일.나이가 든다는 것은시들지 않는 꽃이 피어나는 시간.지금, 이 순간도 향기로운 꽃잎으로 피어나고 있으니굳이 서글퍼하지는 말자는 것.
나무들의 숲에도 곁이 있다겨울이 지나간 자리마다얇은 껍질이 벗겨지고하얀 속살이 빛을 받는다바람은 나무 사이를 흐르며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눈발이 닿은 가지 끝에서가만히 흩어지는 목소리나는 그 곁을 지나는 사람발끝에 닿는 부스러진 낙엽어느 겨울이 남긴 자국인지손끝에 스민 적막한 향기한때 바람의 그림자였던 것들눈 속에 묻힌 채 숨 쉬는 것들나무숲의 흰빛 아래그리운 것은 모두 곁이 된다나무는 나무의 곁을 만들고나는 그 곁에 오래 머문다기억의 잔해 위로 새봄이 내릴 때숲은 다시, 나의 곁이 된다
숨겨진 세상 겨울 아침, 창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먼저 손을 내민다. 반짝이는 햇살이 눈을 간지럽히고, 잔설이 묻은 나무줄기는 서늘한 광택을 띠고 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까치 울음이 이마를 스치듯 지나간다. 겨울 정원에는 잎이 없다. 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 텅 빈 곳에서 무언가를 본다. 흙 속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뿌리들의 미세한 꿈틀거림을, 가지 끝에 보이지 않는 새싹의 조그만 예감을. 지금 이곳은 침묵에 싸여 있지만, 그 안에는 다가올 생명의 속삭임이 있다.여름이면 이 자리에 초록이 번성했었다. 잔디 위로 제비꽃이 피고, 개미 떼가 분주히 오갔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마다 공백만이 깊어진다. 그러나 나는 빈자리에서 무엇인가를 본다. 얼어붙은 땅 아래 숨어 있는 씨앗을, ..
자작나무 미명(未明)의 숲은 서늘했다. 밤새 숨어들었던 바람이 자작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나를 맞이했다. 소매 끝을 스치는 바람은 날카롭고도 부드러웠다. 그것은 겨울의 마지막 숨결이자, 봄을 부르는 서늘한 손짓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새벽빛 아래 펼쳐진 자작나무 숲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하얀 기둥들이 일제히 서 있었다. 하나하나가 별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났다. 나는 그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저 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햇살이 닿기 전인데도, 자작나무들은 이미 빛나고 있었다.가까이 다가가니 나무껍질이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 종잇장처럼 얇게 일어나 있던 껍질은 북풍에 갈라지고, 혹독한 추위에 찢어진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상처들은 전혀 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세월이 새긴 결(..
길 위의 쉼표 바람이 가만히 내 등을 떠미는 날이면나는 발끝의 줄들을 느슨히 풀어둔다.어디로든 흘러가 보라고,시간도 목적도 잊어버리고.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무언가를 놓쳐도 좋겠다.떨어지는 햇살이 내 어깨에 내려앉고,구름 한 조각이 내 머리 위를 스쳐도,그저 가만히 미소로 받아들이며.발자국들이 쌓여 하나의 문장을 이루듯오늘은 쉼표를 찍으며 걷고 싶다.모퉁이마다 물기를 머금은 햇살이 반짝이고나무 위에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이 길 위에서.어디든 닿을 수 있는 길이니굳이 끝을 정하지 않아도 좋다.잠시 벤치에 기대어 눈을 감으면내 안에서 무언가 조용히 자라고 있을 테니.그러다 문득, 뒤돌아보면번거로이 지녔던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져 있고나는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을조금 더 편안히 걸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의 미학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안개가 내려앉은 산봉우리, 저녁노을에 물든 바다,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도시의 불빛.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풍경은 거칠어진다. 바람에 깎인 바위의 상처, 물결에 부서진 파도의 흔적, 도시의 화려한 불빛 아래 어둠에 갇힌 골목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멀리서 동경한다.완벽한 얼굴선과 우아한 몸짓, 흠결 없는 태도를 가진 듯 보이는 사람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매끈해 보이던 얼굴에 미세한 주름이 있고, 조화롭던 말투에도 날 선 모서리가 있다.이상적인 여성상이라는 환상도 마찬가지다.그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감춰져 있는지,혹은 그것이 애초에 허상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아름다움은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흔들린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야만 보..
모래시계 유리병 속에서 모래가 쏟아지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본다.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또 흐른다. 손가락을 뻗어 모래 한 줌을 움켜쥐면, 알갱이들은 작은 틈을 비집고 흩어져 버린다.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시간의 본질.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모래의 속도를 조급하게 재촉하기 시작했다.처음 모래시계를 만든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시간을 가두려는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흘러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자 했던 것일까. 유리병 속 모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아주 정확한 흐름을 만든다. 마치 한 점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 한 알갱이도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 운명을 지닌 듯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알았을까. 정작 우리가 사는 시간은 그렇게 반듯하고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 날,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손끝이 문고리를 맴돌다 멈춘다. 문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문은 내게 저항한 적이 없다. 닫혀 있는 문이란, 스스로 열지 않는 자에게만 벽이 될 뿐이다.나는 문을 바라본다. 문은 단순한 구조물이다. 나무이거나 쇠붙이거나, 때로는 유리처럼 투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문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경계를 짓고, 구획을 나누고, 안과 밖을 구분한다. 문이 있어 공간은 나뉘고, 세계는 겹을 이룬다. 문이 없다면 어찌 안과 밖을 인식할 수 있을까? 문이 없다면 우리는 길을 나설 수 있을까?문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인간관계를 생각한다. 사람 사이에도 문이 있다. 손쉽게 열리는 문도 있지만, 철벽처럼 굳게 닫힌 문도 있다. 어떤 문은 너무 오래 닫혀 녹슬고 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