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길게 누워 있는 오후,
나는 조용히 골방의 문을 연다.
기척조차 없이 열리는 그 순간,
세상의 소음은 가벼운 먼지처럼 가라앉는다.
나는 이 작은 방 안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누추하지만 묵직한 침묵으로
나를 끌어안아 주는 이곳,
나만의 은하계.
나는 이곳을 ‘꿈꾸는 골방’이라 부른다.
골방은 내 마음의 퇴적층이다.
무수한 사유의 침전물이 쌓이고,
감정의 휘발이 응결되어 작은 결정으로 남는다.
벽에 기대앉아 있으면 시간도 숨을 죽인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조차
조심스레 내려앉아
내 어지러운 마음을 천천히 덮는다.
이곳은 나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나를 위로한다.
서두르지 않고, 재촉하지 않으며,
자신을 스스로 꺼내어 보도록 유도한다.
단단히 조였던 생각의 고리를 천천히 풀어낸다.
고요한 혼란 속에서 비로소
말랑한 직관이 움튼다.
현실의 척박함이 사라진 자리에,
나도 모르는 내 안의 봄이 자란다.
나는 이 방에서 수없이 해체되고 다시 조립된다.
때론 과거의 나를 천천히 해체하며
그 조각들을 현재의 빛으로 이어 붙인다.
그 사이사이,
엉뚱한 상상들이 마치 야생초처럼 자라난다.
구체적이지 않아도 좋고,
말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골방은 그런 꿈들에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실없는 이야기마저 보듬는 포용력은
이 공간이 가진 가장 넓은 품이다.
고요하지만 비어 있지 않은 이 방은,
나의 생각들이 발효되기 좋은
미지근한 온도를 지녔다.
불완전한 문장들이 부풀고,
삐걱거리는 감정들이 부드럽게 이완된다.
삶이란 어쩌면 이토록 느리고 은밀한
숙성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방은 그 시간을 존중한다.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골방이 나에게 건네는
유일한 가르침이다.
바깥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
나는 이 방 안에서 ‘존재’
그 자체로 환영받는다.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아도,
어떤 이유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골방은 나에게 묻지 않는다.
단지, 머물게 한다.
숨을 고르게 하고, 언어를 천천히 꺼내게 하고,
깊게 마신 공기만큼 사유하게 한다.
창문 너머로 계절이 바뀌어도,
이 방은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체온을 지닌다.
바깥의 바람이 날카로워도,
이곳에서는 사소한 온기 하나로도 위로가 된다.
여기에선 권위도, 체면도, 비교도 필요 없다.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본다.
남을 통해 비친 내 모습이 아니라,
거울 없이 비로소 발견하는 내 본연의 형태를.
이 골방은 고백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의 부끄러움과 연약함,
두려움과 실수들이
무심한 가구들 사이에 흘러 들어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나는 더 이상 감출 것도, 꾸밀 것도 없는
투명한 나로 앉아 있다.
무게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함께 앉혀두는’ 일.
그것이 골방의 존재 방식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의 저울에서 멀어진 자리,
나는 이 방에서 나만의 저울을 만든다.
때로는 무모한 열망의 한쪽 접시에,
때로는 조용한 기도의 씨앗을
다른 접시에 올려본다.
흔들리며 중심을 잡아보는 연습.
그 반복 끝에,
삶은 조금 더 다정한 얼굴을 가지게 된다.
나는 이 골방을 ‘내면의 서재’라고 부른다.
책장보다 더 많은 문장을 담고 있고,
종이보다 더 따뜻한 여백을 지닌 곳.
언젠가 던져놓은 문장들이
잊힌 채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내 곁으로 와 앉는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자주 조용하고, 때로는 격정적인 그 목소리는
내 정체성과 닿아 있다.
여백이 많은 문장 속에서야
비로소 나는 말을 걸고, 응답한다.
내게 이곳은 마음의 가속도를 낮추는 기밀실이다.
고요함이 곧 확장이다.
결국, 골방은 나를 숨기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나를 드러내기 위한 곳이다.
마치 오래된 항아리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된장처럼,
나는 이 방 안에서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 간다.
허름하지만 고귀하고,
작지만, 무한한 이 공간은
오늘도 말없이 나를 품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여기서는, 너는 너로 살아도 괜찮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