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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시대의 말벗 따스한 햇살은 꽃들을 쓰다듬고,색깔의 합창이 절정을 이룬다.그러나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온도는점점 더 서늘해져만 간다.말이 사라지고 있다.누군가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보다,작은 화면 속 텍스트가 더 가까워졌다.도시의 전철은 붐비지만,그 안의 사람들은 각자의 화면을 응시한 채혼자만의 시간에 잠기어 둥둥 떠 있다.귀에 꽂은 이어폰은 세상을 향해 닫힌 작은 문.서로의 존재를 모른 척하는 이 침묵의 공모.말은 있지만, 말벗은 없다.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고독은 더 이상황혼을 걷는 노인의 그림자가 아니다.청춘도, 아이도, 부모도 저마다의 방, 저마다의 고독 속에서조용히 외로움을 키운다.핵가족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개인’이라는 섬으로 흩뜨렸고,정보화는 ‘연결’이라는 허울로 진짜 관계를 지웠다..
홀로 떠나는 여행길 이따금 나는 지도를 펴지 않는다. 낯선 도시의 이름들, 바다와 강, 산맥을 잇는 경계선 따위는 외려 나를 미로 속에 가두기 때문이다. 길은 언제나 내 안에서 시작되고,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니 여행은 단지 발걸음이 아니라, 감각과 기억, 언어를 이끌고 떠나는 내면의 항해다. 작가에게 여행은 피로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도피가 아니라, 무뎌진 영혼의 귀환이다.누군가는 작가를 꿈꾸는 이유를 묻는다. 나는 다만, 다시 보고, 다시 느끼고, 다시 쓰기 위해 걷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황톳길을 맨발로 걸을 때, 나는 도시의 콘크리트 아래 묻혀 있던 나를 다시 만난다. 허물어진 성벽 위에 앉아 바람에 실려 온 이름 모를 풀잎 냄새를 맡을 때, 내 안의 문장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런 풍경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냥 말이라는 건,때로는 너무 많아서 가슴이 메고때로는 너무 적어서 마음이 저민다.나는 그 사이 어딘가, 말의 틈새에 서서그저 “그냥”이라고 말했다.비가 내리던 날이었다.젖은 창유리는 세상의 윤곽을 지우고,사람들은 저마다 제 속도만큼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그 모든 움직임의 물결 속에서나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멈춰 있었다.누군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나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냥…”그러나 사실은, 할 말이 너무 많아서무엇 하나 꺼낼 수 없었던 거였다.“그냥”그 한 단어 속엔보고 싶다는 말,울고 싶다는 말,붙잡고 싶다는 말,말이 되지 못한 마음들로 겹겹이 접혀 있었다.그리움은 이름을 잃고그냥이 되었고,외로움은 목울대를 지나울음조차 삼키며 그냥이 되었다.쓸쓸함은 창밖에 남겨진 그림자처럼..
마침표 인생의 문장 끝마다 마침표가 찍힌다.은퇴, 이혼, 사별. 어떤 마침표는 예고 없이 찾아오고, 어떤 마침표는 수없이 반복된 쉼표 끝에 조용히 자리 잡는다.서울에서의 모든 일을 중단하고강릉 바닷가로 무턱대고 이사를 결정했을 때, 갑자기 이 세상이 덜컥 끝나버린 듯한 허탈감에 빠졌었다. 매일의 시간표가 사라졌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렸다. 정장은 옷장 깊은 곳으로 밀려났고, 누군가의 필요로 움직이던 하루가, 오롯이 나만의 몫으로 돌아왔다.나는 정적 속에서 낯선 자유를 맞이했다.알람 없이 눈을 뜬 기분은 가볍기보단 공허했고,늘 바삐 움직이던 두 손은 갈 곳을 잃은 듯 허공을 맴돌았다.삶의 궤도를 이탈한 기차처럼,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마침표가 반드시 끝이 아니라..
날고 싶은 새 도시의 아침은 언제나 기계음으로 깨어난다. 알람 소리, 자동차 경적,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소리. 나는 그 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날갯짓을 감지했다. 고개를 들자, 마치 보이지 않는 선에 따라 그어진 듯, 새 떼가 잿빛 하늘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다. 깃털의 곡선이 일으키는 바람, 그 짧은 진동마저 투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하지만 그중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하강하고 있었다. 어딘가 아파 보였다. 날개 끝이 바람을 정확히 가르지 못하고 휘청였다. 그것은 자유의 추락처럼 보였고, 아름다움의 쇠락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쥐었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그러나 붙잡을 수 없는 순간. 그 새는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그날 저녁, 나는 골목 어귀에서 그것을 다시 보았다...
봄날의 이별 한때 세상을 물들이던 꽃들이 하나둘 스러져 간다. 매화는 봄을 가장 먼저 열고, 가장 먼저 진다. 바람이 한 번 스쳐 지나가면 나뭇가지마다 흔적이 지워지고, 다만 잔향만이 남아 봄이 머물렀다 간 자리를 알린다. 마치 먼저 떠난 이의 체온이 아직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듯, 그 향기가 길게 이어진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덧없다고 할 것이다.그러나 이별이란 언제나 그렇다. 가장 찬란한 순간에 찾아와, 무엇도 준비할 틈 없이 스러지는 것.목련의 낙화는 처연하다. 두터운 꽃잎이 하나둘 땅으로 떨어질 때마다, 마치 조용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흰 치맛자락 같은 꽃잎들이 겹겹이 쌓이며, 화려했던 시간을 애도한다. 사랑도 그러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으나, 결국엔 시..
결혼하는 딸에게 딸아,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를 향해 걸어오던 그 순간, 나는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축하한다는 말로 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삶을 시작한다는 기쁨 뒤에, 너를 보내는 아빠의 쓸쓸함이 함께 따라왔단다. 사람들은 흔히 ‘딸을 시집보낸다’라고 하지 않고 ‘딸을 여읜다’라고 하지. 이제야 그 말의 무게를 알겠다. 내 어깨에 내려앉은 공허는 너의 방처럼 조용하고 깊었다.결혼식이 끝난 다음 날, 네가 없는 집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더구나. 네 웃음소리가 배어 있던 거실, 새벽마다 불을 밝혔던 너의 방, 가끔 네가 기대어 앉아 책을 읽던 창가 자리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너만 없었다. 마치 꽃이 진 자리에 향기만 남아 있는 것처럼.나는 멍하니 너의 방에..
꽃을 심는 시인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나는 꽃을 심습니다.사람들이 무심히 스쳐 가는버스 정류장 옆,기약 없는 발자국들 사이무지갯빛 작은 꽃 하나를 심고,그 꽃에 ‘기다림’이라 이름 붙입니다.기다림이 피어나는 어느 날,누군가는 고단한 하루를 내려놓고잠시 그 앞에 멈춰숨을 고르겠지요.꽃이 피면지나는 사람마다자기 마음의 이름으로그 꽃을 부를 겁니다.‘희망’이라거나, ‘괜찮아’하거나,혹은 잊고 지낸그리운 이름을 불러줄지도 모릅니다.그렇게 하루에 하나씩,이름을 얻게 된 꽃들이 늘어나면세상은 조금씩 따뜻해질 것입니다.말보다 눈빛이 먼저 웃고,존중이 인사처럼 피어나는 길,마당에 널린 빨래처럼희망이 햇살 아래 펄럭이는 그런 세상나는 그 세상을 꿈꿉니다.나는 믿습니다.작은 꽃 하나가사람의 마음에시처럼 번질 수 있다는 것을.그 시를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