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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템포 루바토

하루를 통째로 흘려보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날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나는 걷기 위해 나선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걷기 위해 걷는다.
내 안의 소음을 밖의 고요로 바꾸기 위해.
발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언젠가처럼 오늘도 그곳 카페에 닿는다.
바다가 유리창을 통해 스며드는,
소리가 아닌 풍경으로 음악을 들려주는 곳.

카페까지 걷는 아름다운 해변 길은
내게 작고 조용한 의식이다.
나만의 템포로, 마치 쇼팽이 건반 사이에 숨을 심듯,
나는 걷는다.
그것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루바토"
그 템포는 도둑맞은 박자처럼
느리면서도 정직한 내 삶의 리듬이다.
삶에서 그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카페는 늘 바다를 향해 몸을 열어둔다.
하얗게 빛나는 커튼은 햇살을 걸러주고,
바람은 창을 타고 들어와 커피 향과 뒤섞인다.
마치 커피가 바다의 숨결을 머금은 듯,
첫 모금은 늘 잊었던 계절 하나를 데려온다.
오늘은 겨울의 시작 같다.
묵직한 어둠과 따뜻한 조화, 조금은 외로운 향.

커피잔을 손에 들고 있노라면,
그 열기가 마치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처럼
내 손끝을 데운다.
그 작은 온기 하나로도 삶은 다시 견딜 만해진다.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책장을 넘긴다.
오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짧은 에세이다.
문장을 따라가다가 문득 멈춘다.
삶이 문장처럼 명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쉼표조차 없이 달리는 러닝머신 같다.
그런 내 일상에 이곳 카페는
한 문단을 통째로 쉬게 하는 여백이다.

나는 이곳에서 여러 번 나 자신과 마주쳤다.
상처 난 채로 앉아 있던 날도 있었고,
아무런 감정 없이 멍하니 앉아 있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재조립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세상의 큰 소음에서 물러나
내 안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치 고요 속에 놓인 악보를 다시 펼치는 기분이다.

밖에서는 바람이 바다를 몰고 오고,
그 바람은 다시 내 마음을 흔든다.
가끔은 눈물보다
바람이 감정을 더 솔직하게 드러낸다.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감정도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결국은 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간다.
이제는 삶을 억지로 이기려 들지 않는다.
그저 잠시 기대어 쉬는 것도 용기라는 것을,
이곳에서 배웠으니까.

세상의 중심이 나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그 아이러니가 이토록 위로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우리는 늘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에 묶여 살아간다.
하지만 여기에 앉아 있으면,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조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음악이 음 하나로 완성되지 않듯,
인생도 단 하나의 목적만으로는 아름다워질 수 없다.

음악이 흐르고 있다.
재즈의 묵직한 베이스와 가벼운 피아노 소리,
그사이에 놓인 정적까지도 음악처럼 느껴진다.
카페는 늘 변함없다.
음악과 커피, 바람과 책,
이 모든 것들이 충돌하지 않고 나란히 존재한다.
마치 내가 지향하던 삶의 방식처럼.

오늘따라 햇살이 창틀을 넘는 각도가 예쁘다.
커피잔에 반사된 빛이 테이블을 부드럽게 적신다.
누군가 말했다. '삶은 결국, 빛이 닿는 순간들을
얼마나 많이 모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내 생의 가장 찬란한 하나로 남을 것이다.

밖에서는 파도가 여전히 리듬을 연주하고 있다.
나는 마저 남은 커피를 들이켜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커피의 향 속에,
내일의 바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은 고요 속에서 나는 다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충전한다.

잠시 뒤,
나는 커피잔을 비우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아마도 지금보다
조금 더 가벼워져 있을 것이다.
짐을 던 것이 아니라,
짐의 무게를 나누어줄 침묵을 얻었기 때문이다.

삶은 매일 같은 듯 다르고,
걷는 길은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나의 리듬대로, 나의 음표대로.
그리고 내일도 어쩌면,
무심히 다시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길지도 모른다.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마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부지런히 걸으며
내 삶의 조화와 평온을 찾아갈 것이다.
"템포 루바토"로 그러나 결코 불협화음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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