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은 꽃들을 쓰다듬고,
색깔의 합창이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온도는
점점 더 서늘해져만 간다.
말이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보다,
작은 화면 속 텍스트가 더 가까워졌다.
도시의 전철은 붐비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각자의 화면을 응시한 채
혼자만의 시간에 잠기어 둥둥 떠 있다.
귀에 꽂은 이어폰은 세상을 향해 닫힌 작은 문.
서로의 존재를 모른 척하는 이 침묵의 공모.
말은 있지만, 말벗은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고독은 더 이상
황혼을 걷는 노인의 그림자가 아니다.
청춘도, 아이도, 부모도
저마다의 방, 저마다의 고독 속에서
조용히 외로움을 키운다.
핵가족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개인’이라는 섬으로 흩뜨렸고,
정보화는 ‘연결’이라는 허울로
진짜 관계를 지웠다.
SNS는 감정을 전시하는 진열장이지만,
공감이 숨 쉴 틈은 없다.
‘좋아요’는 진심의 무게를 대신할 수 없고,
짧은 댓글은 긴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자꾸 화면을 들여다본다.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싫다고 말할 용기도 필요 없으니까.
우리는 서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점점 더 말이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가끔 ‘찾아가는 말벗 서비스’ 같은 것이
뉴스에 나온다.
혼자 사는 노인들을 위한 따뜻한 복지라지만,
거기엔 생의 공기가 빠져 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질문, 정해진 미소.
기계적으로 맥박을 확인하는 손길은 있으나,
마음 온도를 재는 사람은 없다.
인공지능 로봇도 있다지만,
정해진 알고리즘은
예측할 수 있는 대화만 허락할 뿐,
상처의 무게나 망설임의 결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말벗은,
삶의 떨림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말보다 먼저 눈빛이 닿고,
침묵조차 언어가 되는 존재.
이해하지 못해도 끝까지
곁에 머물 수 있는 사람.
나의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먼저 읽어내는 사람.
말벗은 다름을 인정하는 평등한 언어이고,
무언가를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저 머무름. 그 자체로 충분한 동행이며,
고요한 감정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인내의 자세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만큼
누구도 나에게 다가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말벗은, 내 안에서 먼저 시작된다.
지금 우리가 잊고 있는 건
대단한 위로도, 현명한 말도 아니다.
그저 진심으로 묻는 한마디.
“요즘, 어떻게 지내?”
그리고 그 물음에
“너라서 말할 수 있어.” 라고,
답할 수 있는 용기.
말벗은, 말을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제 말 없는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심을 꺼내는 데 익숙해지고,
상처를 들려주는 데 용감해지자.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서로를 부르자.
그렇게 우리는 사람의 온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곁에 있는 존재.
진정한 말벗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