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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홀로 떠나는 여행길

이따금 나는 지도를 펴지 않는다.
낯선 도시의 이름들, 바다와 강,
산맥을 잇는 경계선 따위는
외려 나를 미로 속에 가두기 때문이다.
길은 언제나 내 안에서 시작되고,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니 여행은 단지 발걸음이 아니라,
감각과 기억,
언어를 이끌고 떠나는 내면의 항해다.
작가에게 여행은 피로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도피가 아니라, 무뎌진 영혼의 귀환이다.

누군가는 작가를 꿈꾸는 이유를 묻는다.
나는 다만, 다시 보고, 다시 느끼고,
다시 쓰기 위해 걷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황톳길을 맨발로 걸을 때,
나는 도시의 콘크리트 아래 묻혀 있던
나를 다시 만난다.
허물어진 성벽 위에 앉아
바람에 실려 온 이름 모를 풀잎 냄새를 맡을 때,
내 안의 문장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런 풍경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나를 깨우는 인상이고,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기억이다.

작가에게 여행은
육체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어진 감각들을 되살리러 가는 일이다.
낯선 냄새, 이방의 소리,
다른 구조의 하늘 아래서만 깨어나는
어떤 감정이 있다.
그것들은 말없이 뼛속을 두드린다.
그리하여 그는 오래 묵혀 있던
언어의 침전물을 다시 길어 올린다.

여행은 때때로 도망이고, 종종 정면승부다.
안일함과 무감각은 나를 서서히 갉아먹는다.
폭주하는 시대의 욕망은
상처 입은 인간들을 내쫓고,
기계처럼 살아가라 말한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떠남은 거대한 탈출이 아니라,
작고 느린 해방이다.
외진 마을의 초라한 정류장,
이름 없는 골목의 벽화 한 조각,
할머니의 굽은 등이 말없이 가르쳐주는
어떤 삶의 진실을 만나기 위함이다.
작가는 그 앞에 서서 귀 기울인다.
그것이 바로, 방관자이자
연민의 산책자로서의 작가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상처를 응시하는 일이다.
인간은 왜 사랑하다가 등을 돌리고,
왜 꿈을 꾸다가 체념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여행지의 저녁노을처럼
막막하지만 아름답다.
고요히 식어가는 숲길에서
나는 그런 질문들과 나란히 걷는다.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아
지나간 인연을 떠올리기도 하고,
가난한 마을의 아이들 눈빛 속에서
잊고 지낸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작가의 여정이란, 사랑과 슬픔,
분노와 기쁨 같은 감정을
제 몸에 다시 입히는 일이다.

중요한 건 ‘풍경과 인상’의 화음이다.
풍경은 나를 감싸는 현실이지만,
인상은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꿈이다.
그 둘이 맞닿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림이 생긴다.
그것이 글이 된다.
그러므로 어떤 여행지는
단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결이다.
빛과 그림자의 어긋남 속에서
기억은 틈입하고, 낯선 사람의 말투 하나에도
오래된 사연이 깃든다.
작가는 그것을 듣는다,
기록한다, 사랑한다.

삶은 자주 폭력적이다.
예기치 않은 실연, 예의 없는 이별,
얼굴을 가린 슬픔이 소음처럼 달라붙는다.
작가는 그 모든 상처 위에 손을 얹는다.
이해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설명하지 않고 쓰다듬는 것.
글은 때때로 말보다 조용한 치료가 된다.

보들레르의 말처럼,
작가는 군중 속을 산책하는 방관자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관찰자에 머물지 않는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본다는 것이므로,
그는 거리를 걸을수록
더 깊은 내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매번 걷는 거리는 다르지만,
그 끝에서 마주하는 얼굴은 언제나 자신이다.

길 위에서 작가가 찾는 것은
사실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인상이다. 객관적인 풍경이
그의 내면을 건드려 떨릴 때,
그것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추억이 된다.
노을 진 들판이
누군가의 마지막 눈빛을 닮았을 때,
조약돌 길이 어린 시절의 발자국을 데려올 때,
여행은 순간 신화가 된다.

혼자라는 말은 외롭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에게 혼자라는 것은
자아의 울림을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상태다.
때로는 복잡한 여행지에서도
공원 한쪽 벤치에 앉아
노란 나뭇잎 하나를 바라보는 일이
더 큰 깨달음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시선이다.

때로는 가까운 공원의 한 벤치에서도,
나는 먼 대륙의 길 위에 선 기분이 든다.
중요한 건 거리가 아니라, 시선이다.
새로운 눈으로 보는 순간,
모든 것은 낯설고 아름다워진다.
함께 여행하는 이가 있다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고독은 글을 낳고,
혼자 있는 시간은 진실을 가려낸다.
누구도 대신 걸을 수 없는 길,
그것이 작가의 길이다.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종착지는 없다.
매번 떠나고, 매번 돌아오고,
매번 다시 쓰는 여정일 뿐.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안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길 위에서
길을 잃어야 비로소 자기 문장을 얻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문장은,
언젠가 누군가의 어두운 방에
불을 켤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또 떠날 것이다.
쓰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과거를 죽이고 다시 살아나는
그 고독한 영혼의 싸움은
길 위에서조차 계속된다.
그러나 그 싸움 속에서 그는 존재의 본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 흔적을 글로 남긴다.
언젠가,
누군가의 삶에 조용히 스며들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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