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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의 서사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 위에외로이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잎사귀는 바람에 스러지고,뿌리마저 얼어붙을 듯한 계절.그러나 땅속 깊이,숨소리마저 얼어드는 어둠 속에서그 나무는 묵묵히 기다렸다.언제 올지 모를 봄의 기척을,햇살의 손길을.밤이 길어질수록그 기다림은 더 깊어지고,겨울의 바람이 거세질수록그 마음은 더 단단해졌다.그러던 어느 날,햇살이 얼음벽을 뚫고 찾아와나무의 굳은살을 어루만질 때,그 순간 나무는 알았다.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라생명이었음을.그리하여,눈 녹아 흐르는 대지 위에연둣빛 잎사귀를 펼쳐내며,온몸으로 노래했다."모든 겨울은, 모든 추위는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노라."그 나무는 말하지 않았다.봄의 하루가얼마나 짧고 유한한지.다만 지금 피어나는순간의 빛으로그 긴 기다림을 채웠다.슬픔과 후회는 없다.단 한..
사랑이란 사랑이란,겨울 새벽 창가에 내려앉는첫서리처럼 조심스레 자리하는 것.그 자리 위에 따뜻한 손을 얹어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키우는 것.사랑이란,고독 속에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환희 속에서 곁을 내어주는 이름.취한 밤의 전화기 너머 흐릿한 음성이 아니라,맑은 아침 햇살 아래 나누는 환한 미소.사랑이란,봄날 벚꽃이 흩날릴 때그 아름다움을 그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가을 산길에서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며같이 웃음 짓고 싶은 그 순간의 온기.사랑이란,추억 속 그림자를 붙잡으려는 몸부림이 아니라,눈앞에 비추는 빛으로 다가서는 걸음.떠나야만 깨닫는 후회가 아니라,곁에 있을 때 이미 채워지는 충만.사랑이란,불완전한 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완전한 '우리'를 그려가는 그림.그렇게, 한 사람의 이름 위에당당히 내 이름을 ..
황혼의 열정 내 안의 태양은 지지 않는다.서쪽 하늘을 물들인 황금빛처럼나는 여전히 뜨겁게 산다.주름이 스며든 얼굴은세월의 지도일 뿐,그 위에 새겨진 길은 내가 걸어온 꿈이다.흰 눈발 같은 머리칼은겨울의 증표가 아니라천 갈래 사유의 나무가 내린 뿌리.황혼이라 불리는 시절에도 새벽처럼 설레인다.더욱 선명해진 빛깔로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쓴다.기억의 잿더미 속에서 아직 불씨를 찾는다.바람을 불어 넣으면다시 타오르는 내 열정의 불길.배우고, 꿈꾸고, 사랑하고가슴속 북소리를 쫓아끝없는 여행을 떠나는 노마드의 삶.이 나이는 황혼이 아니다.이 나이는 무르익은 과일처럼감미로운 완성의 계절이다.
스민다는 것 구름이 바람에 스미고바람은 나뭇잎에 스미고나뭇잎은 햇살에 스미어세상은 그렇게 부드럽게 이어진다.눈물은 뺨에 스미고그리움은 밤에 스미며이야기들은 서로의 침묵 속에 스며들어마음이 되는 법을 배운다.스미는 것은 느리게 움직이는 사랑,비가 대지를 적시며씨앗의 잠을 깨우듯스미는 손길은 모든 것을 피어나게 한다.한 조각 빛이 어둠을 파고들어새벽을 여는 것처럼,한 마디 위로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며새로운 날을 시작하게 한다.틈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그 틈 사이로 꽃이 피고, 풀잎이 흔들리며,삶은 그 스며듦 속에서자기답게 자라난다.스민다는 것은 용기다.닫힌 문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힘이며,거절을 넘는 따뜻한 기다림이다.스민다는 것은 소리 없는 기도다.존재의 온도를 느끼게 하고,감촉도 느껴지게 하는가장 고요한 속삭임이다..
그럭저럭 잘 지내 삶은 끝없는 실타래,바람에 흩날리듯 얽히고 풀린다.너는 저 먼 곳에서내가 알지 못할 풍경을 걷고 있겠지.하지만 여전히,우리의 마음은 가는 선처럼 이어져 있다.가끔 불쑥 찾아오는 그리움은누군가 부는 작은 피리 소리 같아서,문득 귀를 기울이면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그럭저럭 그냥 잘 지내.”너의 말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지친 하루에 스며들었다.그 한마디로 충분했다.삶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우리의 모습이 어쩐지 뭉클하게 다가왔다.나는 나대로의 시간에,너는 너대로의 시간에온종일 시계추처럼 분주히 살아가지만,때로는 그 흔들림 속에서같은 박자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그럭저럭 잘 지낸다는 건,풀리지 않는 매듭을 다독이며다시 한번 매만지는 일.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은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자라는강인한 들꽃 닮았..
겨울 얼마나 걸어왔을까,바람은 흩어지고눈발 사이로 내가 지나온길 위의 발자국이 희미해진다.스스로를 닦아내려는 듯헐벗은 나무들은하얀 이불을 덮으며차디찬 고요를 품는다.겨울은 부드러운 칼날,날카로운 듯 아리지만그 속에 감춰진따스한 쉼의 의식.땅에 누운 잎사귀들은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고바람 속에서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인다.멈춤이란,바라볼 여유를 주는 시간.내면의 눈이 밝아지고나를 이룰 조각들이손끝에 닿는 순간.겨울은 대지의 숨결처럼,쉼과 정리의 계절.그리고 그 끝에서새로운 봄을 준비하는가장 깊은 생명의 약속이다.
그늘 이야기 나무가 아닌 그늘을 바라본다뿌리도 줄기도 없는 그곳에왜 내가 앉아 있는지 묻는다.그늘은 말하지 않는다.대신 빛을 비켜 앉고 어둠의 자락을 펼친다.빛이 그늘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그늘이 빛을 품고 있는 거라면나는 그 경계를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구름은 떠돌다 모여 비가 된다.비는 땅에 스며들어, 또 다른 그늘을 만든다.그곳엔 뿌리가 없지만 자라는 것이 있다.보이지 않는 열매가 열린다.누군가는 그것을 고요라 부르고,누군가는 그것을 기다림이라 부른다.그늘은 어둠의 무게를 견디는 자들이다.빛이 강할수록 그늘도 짙어진다.그늘 속엔 이야기가 있다.말해지지 않은 단어들이 잔잔히 앉아자리를 내준다.그늘에 앉아 있는 내가 있다.그리고 또 하나의 내가 그늘 밖을 바라본다.빛과 어둠 사이,그 얇은 경계를 손끝으로 더듬으..
길들여진다는 건 길들여진다는 건어떤 모양으로든시간과 손끝이 스며든다는 것.뾰족하던 돌이파도의 입맞춤에 둥글어지고,가시에 찔리던 손이장미의 향을 기억하게 되는 일.어린 사슴의 겁먹은 눈빛도마침내 손바닥을 허락하고,눈밭에 새긴 발자국도녹아 흐르며 흙에 스민다.길들여진다는 건반쯤 접힌 마음을다 펼치며 바라보는 것.날카로운 것들이 닳아 없어지고부드러운 것들로 대신 채우는 것.그래서 삶은,길들여져가는 매 순간마다조금씩 노래가 된다.낡은 기타의 줄처럼,때로는 아프게 떨리며그러나 결국엔자신만의 음을 찾는다.길들여진다,그것은 단지 굴복이 아니라배움이자 수용이고,마침내 조용히 물든한 폭의 풍경이 되는 일.그 길 끝에서 우리는언젠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아, 이 삶이 내 것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