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의 고백
오래전, 어머니의 조용한 전화 목소리.“너 요즘은 전화도 뜸하더라.”툭 던지신 그 이야기가, 마치 오래된 돌담에 난 미세한 금처럼 마음을 스르륵 긁고 지나갔다.나는 익숙한 웃음으로 둘러댔다.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그러나 내 마음의 깊은 곳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 짧은 말은 다만,“아들이 보고 싶다”라는가장 길고 애틋한 고백이었다는 것을.사람은 늘사랑도, 미안함도, 고마움도 너무 늦게 해독한다.삶이란, 무엇을 잃고 나서야조금씩 투명해지는 창 같아서,그제야 우리는 마음을 들여다본다.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셨을 때, 나는 그분의 이마에 손 한번 얹지 못했다.엄했던 분, 가까이 가면 날카롭게 다칠 것 같던 거리감.내가 어색해서, 서툴러서.결국, 다정한 말 한마디 못 건넨 채 스르륵 커튼을 닫고 말았..
씨앗의 꿈
바람이 무심히 흘려보낸 흙 한 줌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씨앗 하나가 있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손끝에 닿으면 부서질 듯 연약한 그 조각은 세상의 어떤 위대한 존재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꿈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곧장 피어나지 않았고, 날개도 없었으며, 소리 한 줄기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태초의 별빛을 응축한 것처럼 하나의 세계가 고요히 웅크리고 있었다.미국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아 나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 거목의 시작은, 놀랍게도 손톱보다 작은 씨앗 하나다. 겨우 3그램 남짓의 무게로 수천 년을 견디며, 뿌리를 대지에 박고, 하늘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멈춤 없이 자란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몸체, 수천 개의 계절을 견딘 껍질,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는 뿌리.그..
시간 속에서
시간은 늘 앞질러 달리는 말과 같다. 아무리 고삐를 조여도, 그 맹렬한 속도를 늦출 수 없다. 사람들은 이 거칠고 빠른 생명을 길들일 수 있으리라 믿고, 시간의 갈기 위에 숫자를 새기고, 분초를 쪼개며 달린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살아야만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긴다.나는 한때, 그들과 같은 줄을 따라 달리려 애썼다. 시간은 돈이라 배웠고, 한 시간의 값어치를 계산해 내고, 분 단위로 계획표를 짜며 효율이란 이름의 신을 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문득 발밑의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무언가를 느꼈다. 세상은 시간을 모래주머니처럼 짊어지고 달리라 재촉했지만, 나는 점점 무거워졌다.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나는 무거운 빈 껍데기만 남았다.시간은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다.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