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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시간은 강물처럼 나를 지나쳤다. 한때는 거침없이 흐르는 물살을 타고 노를 저으며 삶의 미로를 가로질렀고, 또 한때는 바위처럼 한자리에 앉아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종이로 된 사진첩을 디지털 앨범으로 옮겨놓았고, 잉크 냄새 짙던 편지는 이제 화면 위의 텍스트로 바뀌었다.나는 아날로그로 태어났다. 연필과 지우개, 필름 카메라 전화기를 돌리던 둥근 손맛을 기억하는 시대. 원고지에 한 글자씩 눌러쓰던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아직 종이 위에 향기를 품은 채 남아 있다. 잉크가 번진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면, 어린 날의 내가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낯설지만 다정한 눈빛으로.기억은 이제 클라우드에 저장되고, 감정은 이모티콘으로 전달된다. 흐름은 기술의 이름으로 내 삶을 재구성했다. 예전에는..
빛의 가장자리에서 쓰는 글 이름이 생기기 전의 새벽도 존재했다.해가 뜨기 전의 그 고요한 청명, 별빛이 오히려 선명히 살아 숨 쉬는 그 시간.무명작가의 삶이란 바로 그러하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찬란히 존재하는 이들.무명은 무지와 다르다.어느 무명작가가 가진 언어와 문장은, 종종 독자의 가슴을 울릴 만큼 예리하고 섬세하다. 단지 그 글이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하늘의 별이 되어 있을 때,그는 바다 밑에서 빛나는 물고기로 살았다.하늘과 바다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진 이름들. 그것은 실력의 틈이 아니라, 운과 시기의 틈이기도 하였다.나는 오래전 한 행사에서,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은 한 노작가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이미 고인이 된 그 작가는, 단 한 권의 책만 출간한 채 문단에 발을 디딘 적 없는 무명이었지만,..
늦은 오후의 고백 오래전, 어머니의 조용한 전화 목소리.“너 요즘은 전화도 뜸하더라.”툭 던지신 그 이야기가, 마치 오래된 돌담에 난 미세한 금처럼 마음을 스르륵 긁고 지나갔다.나는 익숙한 웃음으로 둘러댔다.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그러나 내 마음의 깊은 곳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 짧은 말은 다만,“아들이 보고 싶다”라는가장 길고 애틋한 고백이었다는 것을.사람은 늘사랑도, 미안함도, 고마움도 너무 늦게 해독한다.삶이란, 무엇을 잃고 나서야조금씩 투명해지는 창 같아서,그제야 우리는 마음을 들여다본다.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셨을 때, 나는 그분의 이마에 손 한번 얹지 못했다.엄했던 분, 가까이 가면 날카롭게 다칠 것 같던 거리감.내가 어색해서, 서툴러서.결국, 다정한 말 한마디 못 건넨 채 스르륵 커튼을 닫고 말았..
흐려서 좋고 맑아서 또 좋다 맑은 날에는 세상이 창을 활짝 연 듯하다. 빛은 무게가 없는 데도 마음 한가득 밀려와숨결마저 일렁이게 한다.햇살은 대수롭지 않게 창턱을 넘고, 나뭇잎 사이를 유영하며, 손등 위에 포개진다. 그 미묘한 온기를 느낄 때마다 나는 ‘삶’이라는 단어가맑고 얇게, 마치 물방울처럼 손끝에 맺히는 걸 느낀다.투명하게 반짝이는 오후,공원에선 아이들이 웃음으로 뛰놀고,거리의 소음조차 생명의 리듬처럼 들린다.‘생명’이 얼마나 눈부신 말인가.얼마나 환한 자음과 맑은 모음으로 빚어진 것인가.그런 날이면, 외출을 미루지 못한다.걸음은 경쾌해지고,마음은 공중으로 들려올라어릴 적 종이비행기를 접던 기억처럼 설렌다.햇빛은 감정을 덮어버리기도 한다.모든 것이 반짝이는 날에는눈물조차 무색해지기 때문이다.풀잎 위 이슬은 조용히 떨리고,창..
씨앗의 꿈 바람이 무심히 흘려보낸 흙 한 줌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씨앗 하나가 있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손끝에 닿으면 부서질 듯 연약한 그 조각은 세상의 어떤 위대한 존재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꿈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곧장 피어나지 않았고, 날개도 없었으며, 소리 한 줄기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태초의 별빛을 응축한 것처럼 하나의 세계가 고요히 웅크리고 있었다.미국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아 나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 거목의 시작은, 놀랍게도 손톱보다 작은 씨앗 하나다. 겨우 3그램 남짓의 무게로 수천 년을 견디며, 뿌리를 대지에 박고, 하늘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멈춤 없이 자란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몸체, 수천 개의 계절을 견딘 껍질,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는 뿌리.그..
새벽의 빛 밤이 사라지는 일은 참으로 조용하다. 시끄러운 퇴장은 언제나 낮의 몫이고, 밤은 말없이 자신을 거두어들인다. 내가 사는 이 소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몸을 누이고, 새벽이라는 이름의 숨결이 창가에 맺히는 순간, 나는 조용히 커튼을 젖혔다.그 순간 펼쳐지는 황금빛 바다 풍경은 감동이다.운이 좋아서인지 아침마다 눈부신 동해의 일출을 보는 특권을 누린다.이 시간마다 새로운 시작처럼 느껴지는 매일 달라지는 마법 같은 시간을 만난다.먼동이 터진다는 말이 참 그럴듯하다. 마치 하늘 어딘가에서 빛이 조금씩 터지고, 피어나는 듯했다. 잉태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세계가 서서히 빛을 품어내며 태동하는 그 시간그것은 분명 밤과 낮의 경계가 아닌, 현실과 꿈의 경계였다.거리는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
초록의 귀환 숨결이 번진다.물안개처럼 가볍게, 나뭇잎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떨림이 숲 전체를 물들인다.초록의 귀환’이다.언젠가 떠났던 색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사계의 윤회 속에 잠시 흩어졌던 생명들이 바람의 악보를 타고 돌아와,가지마다 녹음을 피워낸다.그건 변화가 아니라 귀환이다.낡은 겨울의 살갗을 조심스레 벗기고, 초록은 조용히 자신을 회복한다.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이슬 머금은 풀잎이 속삭이듯 말한다."나 여기 있어."겨울을 버틴 연약한 줄기,햇살의 언어를 번역하느라 진동하는 나뭇잎,그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뿌리의 노고로 흙에서 올라오고, 잎맥을 타고 하늘로 닿는다.초록은 나직한 음성으로 존재를 증명한다.그것은 사람의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하늘의 문장이다.아침 해가 잎사귀에 스며드는 장면은캔버스 위의 유..
시간 속에서 시간은 늘 앞질러 달리는 말과 같다. 아무리 고삐를 조여도, 그 맹렬한 속도를 늦출 수 없다. 사람들은 이 거칠고 빠른 생명을 길들일 수 있으리라 믿고, 시간의 갈기 위에 숫자를 새기고, 분초를 쪼개며 달린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살아야만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긴다.나는 한때, 그들과 같은 줄을 따라 달리려 애썼다. 시간은 돈이라 배웠고, 한 시간의 값어치를 계산해 내고, 분 단위로 계획표를 짜며 효율이란 이름의 신을 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문득 발밑의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무언가를 느꼈다. 세상은 시간을 모래주머니처럼 짊어지고 달리라 재촉했지만, 나는 점점 무거워졌다.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나는 무거운 빈 껍데기만 남았다.시간은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다.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