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강물처럼 나를 지나쳤다.
한때는 거침없이 흐르는 물살을 타고
노를 저으며 삶의 미로를 가로질렀고,
또 한때는 바위처럼 한자리에 앉아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종이로 된 사진첩을
디지털 앨범으로 옮겨놓았고,
잉크 냄새 짙던 편지는
이제 화면 위의 텍스트로 바뀌었다.
나는 아날로그로 태어났다.
연필과 지우개, 필름 카메라
전화기를 돌리던 둥근 손맛을 기억하는 시대.
원고지에 한 글자씩 눌러쓰던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아직 종이 위에
향기를 품은 채 남아 있다.
잉크가 번진 종이를 다시 들여다보면,
어린 날의 내가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낯설지만 다정한 눈빛으로.
기억은 이제 클라우드에 저장되고,
감정은 이모티콘으로 전달된다.
흐름은 기술의 이름으로 내 삶을 재구성했다.
예전에는 사진 한 장 찍기 위해
온 가족이 웃으며 기다렸지만,
이제는 셀카를 수십 장 찍고도
마음에 드는 한 장을 찾기 어렵다.
간편함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나는 내가 늙어간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점점 땅을 닮아가고,
손등 위로는 지난 계절의 얼룩이 묻었다.
하지만 늙음은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형성이다.
마치 초겨울의 땅이 얼어붙기 전
마지막 단단한 숨을 들이쉬는 것처럼.
이 육신은 수없이 변형되며
나를 살아있게 했고,
정신은 그 안에서 끝없이 방향을 바꾸며
자라났다.
그러나 이 변화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흐름은 나를 한 방향으로만 밀어내지 않았다.
내면은 더 넓어지고,
사물은 이전보다 느리게 다가왔다.
그 느림 속에서 나는
작은 것들을 귀히 여기는 법을 배웠다.
길가에 피어있는 들꽃 한 송이,
저녁 하늘 위를 나는 철새,
누군가의 말 없는 위로.
그것들은 디지털이 측정할 수 없는 진동으로
내 삶을 채웠다.
삶의 유한함을 이제는 안다.
이 몸이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고,
이름도 기억도 지워질 날이 오리란 것을.
그러나 나는 이 흐름 속에 오래 머물고 싶다.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속에서 내 감정과 기억만큼은
길게 남기고 싶다.
내가 걸었던 길, 보았던 풍경,
누군가의 손을 잡던 그 떨림.
그것들은 나만의 ‘존재의 화석’이 되어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낸 시간, 그때 느꼈던 사랑, 감동
기쁨과 절망, 슬픔의 결들이
나의 실존을 이루고 있기에,
열심히 글과 그림,
사진작업으로 그 느낌과 흔적을 남긴다.
나는 흐름 속에서 살아왔다.
물의 시간, 불의 기억, 흙의 마음, 바람의 말들.
그것들은 모두 나의 일부가 되어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흐름은 나를 지니고 있다.
단단히 움켜쥔 ‘흐름의 악력’이,
내 존재의 마지막 결까지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이 흐름에서
놓일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흐름의 품 안에 머무르리라.
변화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사라져가는 것들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들을 지켜보며.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닫힐 때,
내 안의 빛과 어둠이
조용히 하나의 색으로 섞일 때,
나는 조용히 흐름으로 돌아갈 것이다.
한 점 물방울로, 한 줄기 바람으로,
다시금 필름의 일부로.
그것이 내가 살아온 이유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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