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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노랫말의 품격

늦은 저녁,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TV를 켠다.
흥겨운 전주가 흐르고,
익숙한 듯 낯선 가사가 이어진다.

"한잔해 한잔해 한잔해
갈 때까지 달려보자 한잔해
오늘 밤 (오늘 밤) 너와 내가 (너와 내가)
하나 되어 달려 달려 달려 달려."

의미보다는 흥에 기대어 나열된 단어들.
마치 유리구슬이 바닥에 쏟아져 굴러다니듯,
제법 화려하지만, 허공에 흩어진다.
한때 시를 노래하던 이 땅의 가요는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나는 채널을 바꿨다.

그리운 노래가 생각났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엔 편지를 하겠다는 가사가
스쳐 지나가는 가을날의 풍경과 함께
아련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낙엽이 쌓이는 날’이라는 단어 하나로,
바람이 지나간 자리의 흔적까지 느껴진다.
노래가 단순한 흥이 아니라
삶의 한 조각이 되던 시절이었다.

물론 대중가요는 본디 통속적이다.
하지만 통속적이라 하여
반드시 천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 속에 스며들 노랫말일수록
더욱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이야기하되,
품격을 잃지 않고도 애절할 수 있으며,
그리움을 노래하되,
격조를 지키면서도 애틋할 수 있다.

"누구나 사랑하는 매력적인 내가
한 여자를 찍었지
아름다운 그녀 모습 너무나 섹시해 (샤방샤방)"

사랑이란 것이 그렇게 단순한 걸까.
기다리고, 머뭇거리고,
손끝 하나 닿기 어려운 것이 사랑일 텐데.
한 여자를 찍으면 사랑이 되는 건지
유치한 단어를 툭툭 던지듯 나열한다고 해서
감정이 깊어지는 건 아니다.

생각해 보면,
대중가요는 시대의 얼굴과도 같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감정으로 웃고 울었는지,
무엇을 꿈꾸고 사랑했는지 노래는 그려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얼굴은 어떤가.
"오늘 밤 너와 내가 하나 되어 달려 달려" 같은
단출한 언어로 욕망을 부추기고,
"아름다운 그녀 모습 너무나 섹시해"라는
한 마디로 사랑을 저속하게 표현하는
노랫말 속에, 과연 삶의 깊이와 감동이 있을까.

노랫말은 시(詩)와도 같다.
단어 하나에 담긴 감촉과 여운이 중요하다.
사랑을 말하되 선을 넘지 않고,
그리움을 전하되 감정을 흩트리지 않는다.
마치 오래된 서정시 한 편을 읽는 듯한 감동.
더 깊은 정서를 품듯 감정을 직접 말하는 대신,
그 감정을 환기하는 풍경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노랫말이 지녀야 할 품격이다.

시대는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가요가 그 시대의 감성을 반영하는 예술이라면,
노랫말 또한 그 시대의 정신을 품어야 한다.
노래가 그저 순간의 흥겨움에만 머문다면,
오래도록 불릴 이유가 없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노랫말은 그렇게 은근하고 깊어야 한다.
음악이 귀를 즐겁게 하는 것에 그친다면
반쪽짜리다.
마음을 울리고, 기억을 남기며,
삶을 위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노래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요즘의 노랫말은 다르다.
더 빠르게, 더 직설적으로,
더 즉흥적으로 변했다.
수줍은 설렘이 사라진 자리엔
노골적인 유혹이 자리 잡고,
은유가 걷힌 자리엔
저속한 감각적 표현이 넘실댄다.
가사를 따라 부르다가도
문득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게 되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음악이 사람의 감정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
이제는 단순한 유행이라는 이름 아래
망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한 시인은 말했다.
"말이 곧 그 사람의 품격이며,
글이 곧 그 시대의 얼굴이다."
그렇다면 노랫말도 마찬가지다.
우리 시대의 얼굴이 아름답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더 좋은 언어를 갈망해야 한다.
더 격조 있는 노랫말이
대중의 감성을 적셔야 한다.
말 한 마디가 시가 되고,
노래 한 줄이 가슴 깊이 스며드는 그 순간,
대중가요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시대를 초월한 예술로 거듭날 것이다.

나는 다시 TV의 채널을 원래대로 바꾼다.
다음 곡은, 격조 있는 한 줄의 노랫말이
흘러나오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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