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정원의 어린나무를 보니
삐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곧장 나무 곁으로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줄기가 바람을 따라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었고,
잎사귀는 바람이 불 때마다
한쪽으로만 쏠려 흔들렸다.
이대로 두었다간
나중에 크게 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기어이 지지대를 세웠다.
부드러운 천으로 나무를 묶고,
곧게 자라도록 힘을 주어 곧추세웠다.
시간이 지나도 나무는 여전히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언젠가 지지대를 풀어도
스스로 곧게 설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계절이 몇 번 바뀐 뒤,
지지대를 풀었을 때
나무는 오히려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뿌리는 깊지 않았고,
가지는 바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애초에 바람 따라 몸을 기울이며
자랐야 했을 나무였다.
나 혼자만의 뜻으로 곧게 세운다고 해서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문득 아이들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늘 손을 뻗었다.
넘어지려 하면 붙잡았고,
비틀거리면 바로잡았다.
조금만 삐뚤어져도 안 된다고 다잡았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들을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그 아이들은 저마다 바람 따라
기울어질 필요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이가 말대꾸할 때, 글씨를 삐뚤게 쓸 때,
숟가락을 거칠게 놓을 때마다
나는 바로잡으려 했다.
작은 실수도 지나치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해.’ ‘그건 하면 안 돼.’
‘이게 옳은 거야.’ 내 말은 지지대처럼 단단했고,
아이들은 그 지지대에 묶여 자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아이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좋은 부모였을까.
아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성장을 방해한 것이었을까.
그때는 몰랐다.
훈육이라는 이름 아래 지지대를 세우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이었는지를.
자유롭게 기울어질 수 없었던 나무처럼,
아이들도 자기만의 방향을 찾을 기회를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넘어져야 했다.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이 긁혀야 했다.
바람에 흔들려야 하고, 때로는 비에 젖고,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기울어질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아빠, 날 그냥 놔두면 안 돼요?”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참을 곱씹었다.
지금 정원의 나무는 여전히 휘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억지로 곧게 세우려 하지 않는다.
비록 비뚤어지더라도,
저 나무는 그 나름대로 가장 단단한 방향을
찾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기울어지며 배우고, 흔들리며 단단해질 것이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그냥 놔둘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