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에는 세상이 창을 활짝 연 듯하다.
빛은 무게가 없는 데도 마음 한가득 밀려와
숨결마저 일렁이게 한다.
햇살은 대수롭지 않게 창턱을 넘고,
나뭇잎 사이를 유영하며, 손등 위에 포개진다.
그 미묘한 온기를 느낄 때마다
나는 ‘삶’이라는 단어가
맑고 얇게,
마치 물방울처럼 손끝에 맺히는 걸 느낀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오후,
공원에선 아이들이 웃음으로 뛰놀고,
거리의 소음조차 생명의 리듬처럼 들린다.
‘생명’이 얼마나 눈부신 말인가.
얼마나 환한 자음과
맑은 모음으로 빚어진 것인가.
그런 날이면, 외출을 미루지 못한다.
걸음은 경쾌해지고,
마음은 공중으로 들려올라
어릴 적 종이비행기를 접던 기억처럼 설렌다.
햇빛은 감정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모든 것이 반짝이는 날에는
눈물조차 무색해지기 때문이다.
풀잎 위 이슬은 조용히 떨리고,
창공엔 매미보다 먼저 운
태양의 숨결이 퍼진다.
파스텔처럼 몽환적인 하늘 아래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이렇게 맑아도 괜찮은 걸까.
세상이 너무도 깨끗해 보여,
눈을 찌푸리며 그 찬란함을 의심하게 된다.
흐린 날은 사유가 스며드는 시간이다.
창밖을 적시는 회색의 결들이
천천히 마음의 먼지를 닦아낸다.
이럴 때면 평소 듣지 못하던
내면의 심박조차 선명하게 들린다.
음악은 자연스레 첼로로 흐르고,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은
가느다란 빗줄기처럼 영혼을 적신다.
세상이 조용해질수록,
나는 오히려 또렷해진다.
바쁜 일상에 눌려 외면했던 질문들이
하나씩 문을 두드린다.
나는 누구였는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붙잡고 있는가.
비는 감각을 무디게 하지 않고,
오히려 예민하게 다듬는다.
이마에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 하나로도
마음 한 귀퉁이가 젖는다.
흐린 날에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마음속을 기웃거린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잃은 것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이 침묵 속에서조차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흐린 날의 고요한 고독은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닿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흐림은 감정의 명암을 적셔준다.
기억은 뿌옇게 피어나고,
감정은 침잠하며 실체를 드러낸다.
때로는 오랫동안 응고되어 있던
고독이 눈을 뜨기도 한다.
그런 날, 나는 내 안의 오래된 방을
하나씩 열어보며 낡은 편지를 읽듯
지나온 시간을 더듬는다.
칸트의 책상 위 먼지처럼,
삶의 진리는 분명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맑은 날은 외면을 닮고,
흐린 날은 내면을 닮는다.
하나는 팽창하고, 다른 하나는 침잠한다.
하나는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다른 하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모네가 대낮의 정원에 탐닉했다면,
브람스는 어둑한 방 안에서 침묵을 작곡했다.
찬란함은 사랑할 이유를 발견하게 하고,
어둠은 사랑의 깊이를 되묻게 한다.
맑음과 흐림은 빛과 어둠처럼,
생명과 침묵처럼 서로를 필요로 한다.
나는 그것이 삶의 양손이라고 믿는다.
한 손은 세상을 붙들고,
다른 손은 나 자신을 껴안는다.
한쪽으로만 기운 이는
쉽게 삶에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다.
빛만 좇는 이는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그림자에만 익숙한 이는 새벽을 낯설어한다.
결국, 삶은 빛과 그림자의 호흡 속에서
유영하는 시간이다.
하루는 기쁨으로 물들기도 하고,
또 다른 하루는 질문으로 침전되기도 한다.
어느 날이 더 나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삶의 거울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흐림과 맑음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날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를 살게 하고,
또 살아내게 하므로.
우리는 날씨를 닮은 존재다.
빛을 향해 달리다,
어느 날 문득 그림자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그리고 그 진실은 조용히 속삭인다.
“흐려서 좋고, 맑아서 좋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언제나 살아낼 만한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