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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빛의 가장자리에서 쓰는 글

이름이 생기기 전의 새벽도 존재했다.
해가 뜨기 전의 그 고요한 청명,
별빛이 오히려 선명히 살아 숨 쉬는 그 시간.
무명작가의 삶이란 바로 그러하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찬란히 존재하는 이들.

무명은 무지와 다르다.
어느 무명작가가 가진 언어와 문장은,
종종 독자의 가슴을 울릴 만큼
예리하고 섬세하다.
단지 그 글이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하늘의 별이 되어 있을 때,
그는 바다 밑에서 빛나는 물고기로 살았다.
하늘과 바다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진 이름들.
그것은 실력의 틈이 아니라,
운과 시기의 틈이기도 하였다.

나는 오래전 한 행사에서,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은
한 노작가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이미 고인이 된 그 작가는,
단 한 권의 책만 출간한 채
문단에 발을 디딘 적 없는 무명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그는 조용히 내게 말했다.
“세상은 이름으로 기억하지만,
작품은 기억하지 않아.
진짜를 보는 눈은 대개 늦게 뜨인다네.”

그 말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왔다.
주목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함이 아니라,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라는 뜻이었다.
무명은 선택이 아니었다.
잠시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유명이라는 섬으로 향하는 배에
타지 못한 것뿐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처음부터 타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애써 써 내려간 문장 하나,
밤을 새우며 다듬은 문체의 결 하나가,
세상에 닿지 않아도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도 욕망은 있다.
그 욕망은 때로는 찬란하고,
때로는 나직하게 울린다.
그것은 "읽히고 싶다"라는 갈망이며,
"기억되고 싶다"라는 한숨이다.

유명 작가들의 문장이 대중의 눈을 향한다면,
무명작가의 문장은 대개
누구의 눈도 아닌 마음을 향해 흘러간다.
더디고 느리며,
어떤 때는 오롯이 자기 자신을 향한
토로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 투명하다.
더 아프고, 더 사랑스럽다.

사람들은 유명 작가들을 동경한다.
그들의 필체보다도 이름을,
그들의 문장보다도 출간 부수를.
그러나 나는 안다.
이름은 바람 같고, 명성은 모래성 같다.
오늘의 중심은 내일의 구석진 곳이 되고,
소외는 한 순간의 반짝임으로 전복되기도 한다.
세상은 그렇게 덧없고,
삶은 종종 우연에 몸을 싣는다.
어쩌면 가장 오래 남는 이름은,
한 번도 크게 불리지 않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조용히 읽히고, 천천히 스며든 문장 속에
살아 있는, 그런 이름.

주목받지 못한 작가로서의 삶은
때때로 외롭고 쓰라리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자리에서
여전히 글을 쓰는 것.
이름 없이도, 박수 없이도,
누군가를 위로하고 사로잡을 수 있는 글을.
빛의 가장자리에서 별을 쓰는 사람이다.
비록 밤이 길지라도,
그 별 하나로 누군가의 새벽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찬란한 이름인가.

그리고 언젠가,
빛의 가장자리에서 써 내려간 글들이
어떤 이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조용한 울림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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