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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씨앗의 꿈

바람이 무심히 흘려보낸 흙 한 줌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씨앗 하나가 있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손끝에 닿으면 부서질 듯 연약한 그 조각은
세상의 어떤 위대한 존재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꿈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곧장 피어나지 않았고,
날개도 없었으며,
소리 한 줄기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태초의 별빛을 응축한 것처럼
하나의 세계가 고요히 웅크리고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아 나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 거목의 시작은,
놀랍게도 손톱보다 작은 씨앗 하나다.
겨우 3그램 남짓의 무게로
수천 년을 견디며, 뿌리를 대지에 박고,
하늘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멈춤 없이 자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몸체,
수천 개의 계절을 견딘 껍질,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는 뿌리.

그 거대한 존재도
처음엔, 아주 작은 씨앗이었다.
그 성장은 폭풍도,
가뭄도, 불꽃도 어찌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나무를 더욱 강인하게 다듬는 도구가 되었다.
고난은 무게가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나무는 시련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높이만 100m가 넘는 존재가 되었다.

삶도 그러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씨앗을 지닌 채 태어난다.
꿈이라는 이름으로, 가능성이라는 빛으로.
그러나 씨앗이 나무가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속엔 수많은 인내가 숨어 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땅을 밀어 올리는 고통의 순간이 지나야
비로소 첫 잎이 피어난다.
바로 그때, 존재는 침묵을 깨고
세상과 대화를 시작한다.

고요 속에서 자라는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견딤의 시간이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영국 시인 셸리가 읊었듯,
인내는 희망이다.
그 희망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검고, 차며, 때론 지독하게 무겁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된다.
고난의 겨울을 견딘 씨앗만이 봄을 낳고,
삶의 언저리에서 침묵을 지켜낸 이들만이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

나는 오늘
작은 씨앗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본다.
무게는 없지만,
그 속에 담긴 가능성은 우주만큼 깊다.
삶이란 이토록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아직 보지 못한 꽃, 아직 피우지 못한 꿈,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씨앗에서 시작된다.

고난의 시간,
사람은 자주 자신이 버려진 땅이라 느낀다.
척박하고 거친 땅.
하지만 그런 땅에서도 씨앗은 자란다.
오히려 그곳에서야말로 진짜 뿌리를 내린다.
비바람이 없는 날은 없지만,
뿌리는 바람을 통해 단단해지고,
가지는 눈을 통해 강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실패의 순간마다
묻어둔 씨앗을 떠올려야 한다.

인생이란 결국, 자라나는 일이다.
안에서 바깥으로, 지금에서 미래로.
나무처럼 자라고, 꽃처럼 피고,
별처럼 스러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다시 씨앗이 된다.
누군가의 시간 속에 뿌려질
또 다른 시작이 된다.

그러니, 살아가자.
더디게, 그러나 굳건하게.
뿌리가 먼저 내려가야
줄기가 자란다는 이치처럼,
오늘의 침묵은 내일의 노래를 위한 준비다.
비바람에 흔들리되 뽑히지 말고,
가뭄에 메마르되 꺾이지 말자.
씨앗은, 결국 피어난다.
조금 더디 걸릴 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 안의 모든 계절이
비로소 찬란하게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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