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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초록의 귀환

숨결이 번진다.
물안개처럼 가볍게,
나뭇잎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떨림이
숲 전체를 물들인다.
초록의 귀환’이다.

언젠가 떠났던 색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사계의 윤회 속에 잠시 흩어졌던 생명들이
바람의 악보를 타고 돌아와,
가지마다 녹음을 피워낸다.
그건 변화가 아니라 귀환이다.
낡은 겨울의 살갗을 조심스레 벗기고,
초록은 조용히 자신을 회복한다.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
이슬 머금은 풀잎이 속삭이듯 말한다.
"나 여기 있어."
겨울을 버틴 연약한 줄기,
햇살의 언어를 번역하느라 진동하는 나뭇잎,
그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뿌리의 노고로
흙에서 올라오고, 잎맥을 타고 하늘로 닿는다.
초록은 나직한 음성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것은 사람의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하늘의 문장이다.

아침 해가 잎사귀에 스며드는 장면은
캔버스 위의 유화처럼 농밀하고 은근하다.
빛이 초록에 닿을 때, 색은 온도를 품는다.
따뜻한 초록, 차가운 초록,
한 겹의 빛살 사이에도
수천 가지 표정이 숨어 있다.

연둣빛은 막 태어난 숨결이다.
이슬이 깨우기 전,
꿈속을 떠도는 마음 같아서
그 앞에선 나도 조용히 발끝을 멈춘다.
풀잎 하나에도 기다림이 있고,
어느 날 돌계단 틈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덩굴처럼,
생명은 예고 없이 피어오른다.

성장한다는 건
초록이 짙어지는 과정과 닮았다.
어린 시절, 처음 화분을 키우던 날을 기억한다.
작은 떡잎 하나에도 마음이 들떴고,
시간이 흐르며 나는 점점 더
짙은 녹음을 견딜 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나도 고요한 올리브빛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마치 해질녘 나무처럼, 말 없이 평온하게.

초록은 전혀 무성의하지 않다.
그 안에는 수천의 약속이 모여 있다.
열매가 되리라는 꿈, 햇빛을 품겠다는 의지,
더불어 자라겠다는 믿음.
그리고 그 약속은 늘, 고요하게 지켜진다.
물러설 줄 아는 생명의 지혜로.

초록은 언제나 시작의 색이다.
탄생의 기억, 혹은 무언가의 회복.
무너진 곳에서
가장 먼저 돋아나는 것은 초록이다.
불모의 언덕에서도,
상처 난 마음의 틈에서도 초록은 자라난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초록은 기억의 색이기도 하다.
외갓집 마당의 오이 넝쿨,
학교 뒤 산기슭의 쑥밭,
첫사랑의 치마 끝에 머물던 클로버 향기.
지나온 삶의 페이지마다 번져 있던 그 색은
시간을 건너 다시 나를 이끈다.

꽃은 보여주기 위한 절정이라면,
초록은 숨기기 위한 충만이다.
그 속에는 영겁의 숨결이 들끓고,
누군가의 기다림이 응고되어 있다.
초록은 자주 자신을 지우고 배경이 된다.
그러나 배경이 없는 주인공은 없다.

초록은 스스로 선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언제나 살아 있으되 요란하지 않고,
함께 있으되 중심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오래도록 곁에 머문다.
마음이 지칠 때마다 떠오르는 색,
다시 시작하고 싶게 만드는 색,
어떤 믿음처럼 조용히 피어나는 위안.

한낮의 초록은 눈부시다.
빛의 잔해들이 잎맥 위를 춤추며
세상의 모든 생이 피어난 듯 찬란하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초록은
해가 기울 무렵,
그 마지막 숨결이
땅에 스미는 시간에 찾아온다.

하루를 다 태운 햇살이
조용히 등을 돌리고 나면,
그제야 숨겨졌던 진짜 색이
살며시, 그러나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 초록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얼굴로
고요히,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속삭인다.
“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지.”

그 한마디에 묻혀 있던 봄들이
고요히 되살아난다.
마치 세상의 기억이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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