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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골목길

사람의 마음에도 골목이 있다.
급히 가지 않아도 되는 너그러움,
돌아서 만나는 인연,
멈추어 설 수 있는 자유가.
삶이 한없이 빗겨서 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우리를 덜 외롭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곧게 뻗은 도로가 아닌,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
들어서면 가끔은 되돌아 나와야 하고,
어떤 날은 뜻밖의 풍경과 마주치는 길.
그렇게 나는 내 안의 골목을 걷듯,
오래된 동네의 좁고 휘어진 골목길을 사랑했다.

어머니가 장독대 앞에서
장아찌를 뒤적이는 손길,
바람이 노란 소쿠리 안 고추를
휘감아 날릴 때의 풍경,
고무줄놀이로 흥이 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하나의 장면처럼 덧입혀진 장소.
그 시절의 골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기억이 자라는 시간의 정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정원을 하나쯤은 품고 산다.
그리고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잊고 있던 자신을 다시 만난다.
이 골목은 감각의 책갈피다.
기억을 접어두었던 순간들이
툭툭 접힌 자국을 따라 피어나고,
잊힌 이들의 음성이 벽을 타고 흘러든다.

여기서는 말이 느리다.
걸음도 느리다.
고양이의 눈빛 하나에도 마음이 걸리고,
마주 오는 노인의 인사 한마디에
시간은 한참 머물다 간다.
문간방에서 부채질하던 할머니,
고무 대야에 아기를 씻기던 젊은 엄마,
망설이며 문을 두드리던 첫사랑의 손끝까지.
이 골목은 사람으로 가득 찼었다.
사랑과 다툼, 울음과 웃음이
그 짧은 거리 안에 다 담겨 있었다.
마치 한 권의 두터운 소설책처럼.

어느 날, 내가 알던 골목은 사라졌다.
둥글게 꺾인 길은 직선의 논리에 밀려나고,
벽마다 낙서처럼 새겨졌던
삶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진다.
그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는 크고 반듯하지만,
그 안에서 울리는 아이 울음소리는
이웃의 귀에 닿지 않는다.
서로의 삶에 스며들지 않는 집들,
바람조차 흘러들지 않는 콘크리트의 미로.
더 넓은 도로는 있었지만,
이야기를 담을 골목은 없었다.
우리는 점점 서로의 그림자를 잃고 있었다.

골목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길 하나가 지워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의 소멸이며, '함께'의 해체다.
감정을 눈빛으로 전하고,
소식을 바람에 실어 전하며,
때로는 말없이 다독이던 삶의 언어들이
그 곡선을 따라 자취를 감추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마지막 본능적 공간의 소멸이며,
서로를 인간답게 만들던 감촉의 멸종이다.

골목은 직선이 아니다.
직선은 효율을 말하지만,
골목은 정서를 품는다.
곡선은 안다.
사람은 곧지 않다는 것을,
사랑도 인생도 한 번에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골목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불완전한 흐름 속에서조차
따뜻함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의 ‘골목’이다.
그 작고 느린 거리.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빠른 세상 속에서
잠시 숨 고를 작은 골목 하나를
잃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꿈꾼다.
언젠가 다시 그런 골목을 걸을 수 있기를.
모퉁이마다 누군가의 안부가 있고,
담벼락마다 기억이 기대어 있는 길.
발길이 스며들 수 있고,
마음이 내려앉을 수 있는 길.

골목은, 곧 사람이다.
굽이치고, 틀어지고, 멈춰 서며,
끝내는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사람.
삶이란 결국, 그런 골목 하나를
오래도록 걸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조급하지 않게, 가끔은 되돌아보며,
누구든 마주치면 인사할 수 있는 그 길을.
그곳에 다시, 삶의 향기와 정이 되살아나기를.
그리하여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따뜻해지는 길이 되기를.
골목, 내 마음의 오래된 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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