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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염치를 잃은 사회

염치는 얼굴이다.
누군가를 만나 눈을 맞출 수 있는
최소한의 용기이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얼굴을 붉힐 줄 아는
마지막 인간다움이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이 얼굴을 잃었다.
거울 앞에서조차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염치불고(廉恥不顧)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진다.
정치권은 말의 성찬을 벌이되,
책임은 없는 잔칫상을 차린다.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아도,
그들은 입을 맞춰 궤변을 내뱉는다.
마치 거울 없는 방에서만 살아온 사람처럼,
자신을 비추는 반성의 기미조차 없다.

그들에게 '염치'란
한때 국어 교과서에만 등장하던 단어쯤일까.
불편한 진실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무책임은 우리 모두의 매일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아는가?
권력은 책무의 다른 이름이어야 하지 않던가?
어떻게 그렇게 입만열면 거짖말을 하는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고
언제나 변명과 기만을 일삼는다.
정말 부끄러움도 모르고 몰염치하다.

정치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응고되어 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불법도 합리화되는 시대,
법보다는 돈과 권력이 정의가 되어버린 현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무책임을 보고 자라났고,
어른이 준 교훈은
“성공만 하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마치 다발성 장기 손상 환자와도 같다.
윤리는 신장을, 책임은 폐를,
공정은 심장을 다쳐 버렸다.
이 병을 고치려면 단순한 봉합으로는 안 된다.
사회 전체에 흐르는 의식의 혈류,
그 속에 염치를 주입해야 한다.

그러한 장면들 속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무엇을 보고 자랐는가.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
불법도, 위법도 “수익이 나면 괜찮다”라는
이율배반적인 가치관 속에,
윤리는 점점 먼 별처럼 흐려지고 있다.
도덕은 선택 사항이 되었고,
정의는 타인의 책임이 되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말은
더 이상 풍자가 아니라 지침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자녀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데 익숙해진 부모,
성공의 이름으로 수단을 정당화했던
기성세대의 거울 앞에서도
우리는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아이는 어른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어른이 염치를 잃었기에,
젊은이 또한 염치없는 시대의 자식이 되었다.

염치는 인간의 마지막 파수꾼이다.
잘못을 깨닫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돕는
회복의 문이다.
그것은 감옥보다 깊은 반성의 공간이며,
단죄보다 더 무거운 자각이다.
우리는 지금 그 파수꾼을 밀쳐내고 있다.
그 결과로 한국 사회는
‘다발성 장기 손상 환자’처럼 무너지고 있다.
한 곳만 치료한다고 회복되지 않는다.
정치, 교육, 문화, 가정…
모든 곳이 고장 나 있다.
염치는 바로 그 균열 사이에서
다시 세워야 할 기둥이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봄이 오기 전,
갯버들은 가장 먼저 잎을 틔운다.
그 여린 솜털의 생명이 추위를 견디며
퍼뜨리는 것은 단순한 계절의 전환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자’는 자연의 선언이다.
우리도 그런 봄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서로 위로하며,
작은 염치 하나로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지킬 수 있다면,
이 사회는 다시금 고개를 들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염치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약자를 대할 땐 한 걸음 물러나며,
성공의 이면에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이 작은 실천들이 모여,
하나의 얼굴을 되찾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진짜 얼굴, 사람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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