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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마침표

인생의 문장 끝마다 마침표가 찍힌다.
은퇴, 이혼, 사별.
어떤 마침표는 예고 없이 찾아오고,
어떤 마침표는 수없이 반복된 쉼표 끝에
조용히 자리 잡는다.

서울에서의 모든 일을 중단하고
강릉 바닷가로 무턱대고 이사를 결정했을 때,
갑자기 이 세상이 덜컥 끝나버린 듯한
허탈감에 빠졌었다.
매일의 시간표가 사라졌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렸다.
정장은 옷장 깊은 곳으로 밀려났고,
누군가의 필요로 움직이던 하루가,
오롯이 나만의 몫으로 돌아왔다.

나는 정적 속에서 낯선 자유를 맞이했다.
알람 없이 눈을 뜬 기분은 가볍기보단 공허했고,
늘 바삐 움직이던 두 손은
갈 곳을 잃은 듯 허공을 맴돌았다.
삶의 궤도를 이탈한 기차처럼,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마침표가 반드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 마침표는 다음 문장을 위한
쉼표가 되기도 하며,
숨 고르기를 끝낸 문장이
더 깊어지고 단단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공허의 틈에서 오래전 흑백 사진처럼
바래고 있었던 나의 흥미 하나를
다시 불러내었다.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세상은
낯설 만큼 섬세했다.
나뭇잎 하나에도 결이 있었고,
노을은 매일 다른 온도로 피어났다.
그 아름다움을 담으며 나는 배웠다.
무언가를 ‘본다’라는 것은,
사실 ‘다시 살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인생의 마침표 앞에서
주저앉는다.
익숙한 삶이 꺼진 자리를 상실로 여긴다.
그러나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문장의 호흡일 뿐이다.
쉼표처럼 받아들이면 된다.
문장은 계속될 수 있고,
다른 문장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다.

그 무렵부터 나는 글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감정의 떨림들을
시로 썼고, 시를 쓰다가 수필로 길을 돌렸다
말로 다 되지 않는 마음을
단어의 그물로 건져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호흡하게 했다.
글은 내 안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것들에
작은 출구를 내어주었다.
그 출구를 통해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은퇴 이후의 삶은,
‘일’이 빠진 자리를 채우는 ‘일’로 다시 차올랐다.
돈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오히려 돈이 되지 않기에,
그 일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퇴직 후엔 경제적 어려움이 삶을 짓누른다고.
나 또한 숫자 앞에서 초라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취미는,
삶의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
작은 혁명이었다.

삶의 포트폴리오를 새롭게 편집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퇴직 이후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경제적 안정을 향한
조심스러운 발돋움도 필요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심리의 균형을 맞추기 어려웠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일,
나만의 언어로 하루를 정리하고,
내가 선택한 리듬으로 시간과 관계 맺는 일.
그것이 나를 지탱했다.

우리는 한평생 정답을 쫓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퇴직 이후의 삶은 오답 노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틀렸던 이유를 곱씹는 대신,
이제는 스스로 문제를 내는 일.
의미의 중심을 타인의 평가에서
나의 기쁨으로 옮겨놓는 일.

물론 두려움은 있다.
‘쓸모없음’이라는 그림자가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삶은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진짜 쓰임은, 타인의 필요가 아니라
나의 열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늦게야 알았다.

내 삶의 다음 문장을 쓰는 일.
그것은 나이와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 눈부신 오후의 빛,
작고 평범한 날들의 숨결을 붙들고
살아내는 일이다.
마침표는 문장을 마무리하는 기호이지만,
동시에 다음 문장을 예고하는 문법이다.
인생도 그렇다.
내일의 나는,
어쩌면 오늘보다 덜 강박적이고,
조금 더 나다운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그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어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는 것이니까.
이제 나는 삶을 한 편의 시처럼 가다듬는다.
때로는 서툴게, 때로는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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