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아침은 언제나 기계음으로 깨어난다.
알람 소리, 자동차 경적,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소리.
나는 그 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날갯짓을 감지했다.
고개를 들자,
마치 보이지 않는 선에 따라 그어진 듯,
새 떼가 잿빛 하늘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다.
깃털의 곡선이 일으키는 바람,
그 짧은 진동마저 투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중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하강하고 있었다.
어딘가 아파 보였다.
날개 끝이 바람을 정확히 가르지 못하고 휘청였다.
그것은 자유의 추락처럼 보였고,
아름다움의 쇠락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쥐었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그러나 붙잡을 수 없는 순간.
그 새는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날 저녁,
나는 골목 어귀에서 그것을 다시 보았다.
몸은 반쯤 접힌 채 길가에 엎드려 있었고,
깃털은 흩어져 빛을 흡수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감긴 채였으나,
어쩐지 ‘두려웠다’라는 감정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는 그리 작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누워 있는 모습은 너무도 작고 여렸다.
마치 세상의 끝에 홀로 남겨진 어떤 존재처럼.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나는 그날,
새의 죽음 속에서 우리가 매일 놓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았다.
가령, 우리가 가두고 잊어버린 하늘의 기억,
한 생명이 겪은 최후의 고통,
그리고 우리 안에 있었던
자그마한 연민 같은 것들.
나는 문득, 갈매기 조나단이 떠올랐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인간들이 규정한 ‘먹이를 위한 비행’에서 벗어나,
순수한 날개의 의미를 찾아
하늘 끝까지 비상하던 조나단.
그러나 도시는 그런 비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시는 철근과 콘크리트, 그리고 유리,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름의 날 수 없는 새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그 안에서 깃털을 잃어가고 있다.
날개는 있지만 날 수 없고,
목소리는 있지만 울 수 없다.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도시는 언제나 상처 입은 새를 낳는다”라고 썼다.
맞다. 우리는 때때로 날고 싶었고,
때때로 추락했으며,
결국 날지 못한 날들의 조각으로 살아왔다.
도시에는 ‘날고 싶은 새’가 너무 많다.
높이 나는 것을 꿈꾸지만,
반복되는 출퇴근과 인간관계,
숨 막히는 규칙들에 날개를 접고 사는 이들.
그들은 잊고 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것을.
높이 난다는 건 단지 위로 솟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중력을 이겨내는 의지의 비상임을.
우리는 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새를 가둔다.
실내의 조명 아래, 창살 없는 케이지 속에서
자유를 흉내 낸 자유.
나는 그 울음이 종종 우리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 같다고 느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하늘’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 새의 주검 앞에서,
도시의 야경보다 어두운 우리들의 내면을 보았다.
비행을 잃은 존재의 슬픔,
그리고 더 이상 허공을 꿈꾸지 않는
삶의 공허함을.
그러나 나는 믿는다.
새는 결코 완전히 소유되지 않는다.
그것이 죽었을지라도,
그 비행의 흔적은 하늘 어딘가에 남아 있으리라.
잊힌 자유, 묻힌 꿈, 파편이 된 희망…
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다시 날아오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