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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소리의 결

고요 속에서 소리를 들었다.
아니, 소리가 고요를 들추어내었다.

아침 이슬이 풀잎을 스칠 때 소리는 투명하다.
먼동이 틀 무렵, 첫 새의 지저귐은 맑고 선명하다.
밤새 뜬 눈으로 흐르던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풀어놓는 한숨은 길고 부드럽다.
모든 소리는 저마다의 결을 가지고 있다.
투명한 소리, 맑은소리, 부드러운 소리.
소리에도 결이 있고, 그 결마다 감촉이 있다.

소리는 단순한 파동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체온이고 감정의 결이다.
어떤 소리는 촉촉하고, 어떤 소리는 서늘하다.
어떤 소리는 반짝이고, 어떤 소리는 거칠다.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때 비로소 소리는 파동이 아니라 결이 되고,
피부에 스미는 촉감이 된다.

서울에서 평생을 사는 동안
나는 너무 많은 소리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소란스러울수록 공허했다.
자동차 경적과 광고 방송,
서로를 밀어내듯 부딪히는 목소리들.
그 사이에서 나는
점점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잠시 깊은 산중마을, 산계리로 이사했다.
지명에서조차 고요가 스며 나오는
오지 중의 오지.
새벽이면 안개가 능선을 넘나들고,
계곡가엔 물매화가 피어난다.
뻐꾸기 울음과 고라니의 외마디 소리,
아침이면 마을의 닭 울음이
가녀린 선율처럼 퍼진다.
앞마당의 아름드리 굴참나무는
밤사이 기지개를 켜며 속삭이고,
이따금 낙엽이 땅에 닿으며 가볍게 숨을 뱉는다.
그런 날이면 소리가 서로를 보듬으며
얇은 천처럼 포개졌다.
나는 그 위를 조심스레 거닐었다.

어느 겨울밤, 눈이 내렸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자
아주 조용한 소리가 있었다.
지붕 위로 눈이 내려앉으며 숨을 고르는 소리,
나뭇가지 끝에서 몸을 웅크리는 소리.
그것은 겨울의 숨결 같았고,
고요를 깨뜨리지 않는 침묵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고요 속에서도 소리는 흐른다는 것을.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밥을 짓던 소리가 떠오른다.
쌀이 물에 잠기며 내는 작고 둥근 소리,
손끝으로 쌀알을 헤아리는 부드러운 마찰음,
뚜껑을 여닫는 소리가 품고 있던 숨결.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풍경과 마음이었다는 것을.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소리는 눈으로도 들린다.
해가 질 녘 들판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황금빛으로 스치는 소리를 볼 수 있다.
이른 새벽, 호수 위를 떠도는 물안개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이 가만해지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들리고,
들리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소리는 분명한 결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 결을 따라 기억을 떠올리고,
풍경을 그리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소리가 빚어낸 결을
오래도록 손끝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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