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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자작나무

미명(未明)의 숲은 서늘했다.
밤새 숨어들었던 바람이
자작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나를 맞이했다.
소매 끝을 스치는 바람은
날카롭고도 부드러웠다.
그것은 겨울의 마지막 숨결이자,
봄을 부르는 서늘한 손짓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새벽빛 아래 펼쳐진 자작나무 숲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하얀 기둥들이 일제히 서 있었다.
하나하나가 별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났다.
나는 그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저 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햇살이 닿기 전인데도,
자작나무들은 이미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나무껍질이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
종잇장처럼 얇게 일어나 있던 껍질은
북풍에 갈라지고,
혹독한 추위에 찢어진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상처들은 전혀 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세월이 새긴 결(結)이자,
생이 지나온 궤적처럼 느껴졌다.
자작나무는 고요히,
그러나 단단하게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나무껍질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거칠지만 따뜻했다.
혹독한 계절을 온몸으로 견디고도,
이렇게 빛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니.
상처를 품고도
여전히 곧게 선 자작나무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인간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고통은 우리를 꺾지 못한다.
다만 다듬을 뿐이다.

자작나무는
그 어떤 나무보다 먼저 잎을 떨군다.
혹한이 오기 전,
자발적으로 무게를 덜어낸다.
살아남기 위해, 더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
그리고 그 대가로,
겨울의 숲에서 누구보다 환하게 빛난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견뎌야 할 계절이 오면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지나간 사랑, 불확실한 희망, 이루지 못한 꿈들.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한 겹씩 벗겨져 나가지만,
그 상실이 곧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삶이 우리를 단련하는 과정일 것이다.

저 나무들도
처음부터 이렇게 단단했던 것은 아닐 터.
바람에 흔들리고, 꺾이고,
부러지기도 하며
숲속에서 함께 성장해 온 것이다.
상처 입은 몸통을 맞대고 서로를 지지하며,
쓰러지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며.

나는 오래도록 숲 한가운데 서 있었다.
몸을 감싼 바람이 서늘했지만,
마음속에는 묘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작나무들의 빛이 등을 밀어주었다.

어느 순간, 나도 그들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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