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소리

그곳엔 물결처럼 밀려오는 소리가 있다.
한낮의 숲을 가로지르며
파문처럼 퍼지는 잎새의 숨소리,
뿌리 깊은 나무의 속삭임,
그리고 먼 하늘 끝에서 쓸어내리는
햇살의 정적마저도.
귀 기울이면 들린다.
삶의 굴곡마다 묻어 있는,
닿지 않지만 흐르는, 파도 같은 소리.

바닷가 모래 위를 걷다 보면
규칙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있다.
모래를 쓸고 지나가며 무언가를 털어내는 소리.
밤새 어둠을 끌어안고 앓던 바다가
겨우 새벽을 맞이하며 토해내는 한숨 같은 소리.
그 소리에 내 마음도 습기로 눅눅해진다.
애써 감춰두었던 회한이 툭, 고개를 내민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파도를 맞았던가.
사정없이 덮쳐오는 감정, 허무, 실망, 미움.
그것들은 한 번쯤은 나를 삼켜버릴 듯 치솟았지만
결국 바다는 늘 그랬듯 이내 잦아들고야 말았다.
그 반복 안에서 우리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또다시 무너지더라도 돌아오기 위해 살아간다.
울컥 거리는 그 소리는, 다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감정의 온기다.
바닷바람에 눈시울을 훔치며 나는 생각했다.
혹시 그 울컥거림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징표는 아닐까 하고.

계절의 끝자락, 논두렁을 지나던 날,
허수아비 하나가 서 있었다.
누렇게 바랜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며
'쓸쓸하다'는 말 없이도 그 모든 말을 했다.
그 옆에 피어 있던 들꽃 한 송이,
꺾이지 않고 가만히 흔들리는 모습에서
문득 생각났다.
우리의 말 없는 하루들도 저렇게,
흔들리기만 하다 사라져간다는 걸.

텅 빈 소리는 말이 없는 것 같지만,
가장 많은 것을 말한다.
눈빛으로 하는 다짐,
손끝으로 전해지는 위로,
이윽고 삶은,
소리 없는 소리로 사랑을 건네고, 시간을 넘긴다.
그래서 누군가와의 침묵이
어쩐지 더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허수아비가 지키는 것은 논이 아니라
그 논을 지나가는 이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도심의 골목길,
오랜 시간을 버텨온 나무문이 열릴 때 들리는
그 삐걱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처음엔 무심히 지나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소리가 귀에 걸린다.
마치 "나 아직 여기 있어"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도
그렇게 삐걱거리며 굴러간다.
사람과의 관계도, 직장에서의 일도,
심지어 나 자신과의 싸움조차도 매끄럽지 않다.
낡은 경첩처럼 어딘가 모르게 삐거덕댄다.
하지만 그 삐걱거림조차도
시간과 추억이 밴 소리라면,
조금은 다정하게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마음의 문을 삐걱거리며 연다.
혹여 누가 들어와 오래 앉아주기를,
묵은 얘기를 함께 삐걱거리며 나누어보기를.

다람쥐 한 마리가 미끄러지듯
나뭇가지 사이로 달려가다 미끄러져
아래가지로 떨어지며
허둥대며 되돌아 올라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
이런 웃음은 설명할 수 없다.
말로 하면 하찮고, 표현하면 사라진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내 삶 또한
이런 찰나의 웃음으로 엮여 있었다는걸.
전철 안에서 졸다가 고개를 부딪치고
서로 눈 마주쳐 웃던 낯선 사람,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뛰던 아이의 함성,
마트 계산대 앞에서
내 앞사람이 계산하던 걸 잊고
내 차례인 줄 착각하고 "아, 미안해요!" 하며
머쓱해하던 순간들.
다 지나간 일들이지만,
그때 그 웃음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었구나.

그 웃음은 때때로 삶을 붙들어준다.
지긋지긋한 현실에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이
잠시 기대 쉴 수 있는 작은 그늘이 되어준다.
허탈하고, 아무 의미 없는 듯한 웃음 한 조각에
우리는 슬며시 구겨 넣는다.
미련도, 포기도, 위안도.

인생이란 건 어쩌면 그렇게 피식 웃는 소리로
이어져 있는 게 아닐까.
대단한 감동도, 특별한 기적도 없이,
어이없고 시시한 순간 속에서 찾아낸
겨자씨만 한 유쾌함 하나.
그게 사람 사는 일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말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삶도 그렇다.
매끄럽지 않은 모든 소리,
사라질 듯 미약한 울림,
허공에 흩어지는 듯한 웃음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다른 소리로 이어질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걷는다.
저마다의 소리를 품고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 틈에서,
내 삶의 작은 울림 하나를 들어본다.
그것이 설령 울컥하는 파도 소리일지라도,
텅 빈 바람 소리일지라도,
피식 웃는 사람 소리일지라도.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템포 루바토  (1) 2025.05.22
자화상  (0) 2025.05.20
  (2) 2025.05.18
몰입  (0) 2025.05.17
여백이 있는 삶  (1) 20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