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면 하루는 천천히 제 무게를 벗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머리를 베개에 얹는
그 일련의 동작이 예전엔 마치 자동문처럼
나를 꿈의 세계로 들여보내곤 했다.
요즘은 다르다.
나는 매일 밤, 여전히 자리에서 분주하다.
오늘이라는 날은 이미 저편으로 물러났건만,
뇌는 마치 마지막 의사결정권자라도 되는 양,
생각과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검열하느라
푸른 조명을 깜빡인다.
예전엔 잠이란,
단추만 눌러도 작동하는 전등 같았다.
하루가 가기도 전에, 나는 먼저 잠에 잠식되곤 했다.
피곤이 쏟아지면,
잠은 고요한 마법처럼 나를 삼켜버렸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잠은 문턱에서 망설이고,
나는 그를 기다리는 구애자가 되었다.
몸은 자자고 아우성인데
마음은 깨어 있으라며 등을 민다.
생체리듬은 이제 친구가 아니다.
나를 이끌지도, 함께 춤추지도 않고,
멀찍이서 수군거리기만 한다.
마치 내가 불청객인 듯.
잠은 내가 부르기를 멈추면
어쩌다 찾아오는 고양이 같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훑어보다,
내 마음이 풀린 틈을 타 스르르 안긴다.
밤은 긴 고백이다.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 같은 것.
‘오늘은 참 잘 버텼지?’
‘그때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잖아.’
이불 속에서 나는 하루의 찌꺼기들을 추려내며
반성도, 회한도, 미련도 끌어안는다.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이 과도한 정리벽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나를 도무지 믿지 못해서일까.
나는 매일 밤,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를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리고 그 불안이, 잠을 멀리 보낸다.
시간은 졸음보다 느리게 흐르고,
시계바늘은 마치 내 가슴속에서 돌아가는 듯하다. 똑딱이는 소리가 심장의 박동처럼 크다.
이건 생존의 리듬이 아니라 망설임의 리듬이다.
침대 위에 놓인 내 몸은 껍질처럼 가볍고,
그 속의 의식만이 무겁다.
내면이 도리어 밤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생각은 사방으로 퍼지고,
누군가의 말투나 표정,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이 밤의 벽을 두드린다.
잠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닿지 않는다.
손끝에서 번지는 물안개처럼.
어쩌면 잠은 감각이 아니라 화해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과 하루의 모든 잔여와,
내일의 두려움과 타협해야만 문을 여는 미로.
그러나 나는 아직도 오늘을 놓지 못한 채
어제와 내일을 동시에 쥐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잠은 고요한 무위인데,
나는 늘 '해야 할 무언가'로 가득 찬 채로
그 문 앞에 서 있다.
어쩌면 잠은 살아 있는 생명이다.
의식의 줄기를 휘감고,
감각의 잎을 하나씩 떨어뜨린 후,
조용히 뿌리를 내리는 생물.
나는 그 잠이라는 생명에게
매일 밤 번식지를 내어준다.
하지만 그 생명은 이제 날 외면하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내 곁에 머물다,
내가 잠시 움직이기만 해도 달아나버린다.
잠은 불러도 오지 않고, 잊을수록 가까워진다.
사랑과 닮은꼴이다.
이제 나는 잠과 싸우지 않는다.
승산이 없다는 걸 안다.
대신 매일 밤, 몸을 내려놓는다.
싸움이 아니라 항복이다.
강박을 벗어놓고,
내일이라는 단어도 내 밖으로 밀어낸다.
자야 한다는 의무보다,
그냥 누워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내려다 보이는 집들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다.
마치 그들도 나처럼 조용히 오늘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잠에게 몸을 맡기는 것 같다.
나는 그 모습이 위로가 된다.
내가 자지 못해도,
누군가는 자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만으로도 세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