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종이 위 남겨진 비어 있는 공간,
말과 말 사이 숨을 고르는 쉼표,
혹은 마음 한구석 텅 비워둔 자리.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그곳엔 온기가 스민다.
글씨가 빼곡한 문장보다
여백이 살아 숨 쉬는 문장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삶도 그렇다.
빈틈없이 빽빽한 하루보다
한숨 돌릴 틈이 있는 하루가
더 살 만하다.
달도 완전한 둥근달보다
이지러진 반달이
오래도록 바라보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꽉 찬 것보다
비워진 것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수묵화에서 여백이 있어야
먹의 번짐이 살아나고,
음악에서도 쉼표가 있어야
리듬이 완성되듯이.
나도 한때는 여백 없는 삶을 살았다.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채우고,
의미 없는 공백을 죄책감으로 여겼다.
그러다 문득,
여백이 있는 순간이
가장 따뜻했음을 깨닫는다.
이른 아침,
창가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는 시간.
바쁜 대화 속에서도
문득 찾아오는 조용한 침묵.
서로 아무 말 없이도
편안한 사람과 나누는 눈빛.
그것이야말로
마음속 여백이 주는 온기였다.
법정 스님은 방을 텅 비워두었다.
그래서 바람도, 새도,
사람도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너무 빽빽하게 채우면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다.
조금 비워두어야 무엇인가 스며들고,
누군가 다가온다.
이제는 여백을 남기는 삶을 살고 싶다.
때로는 할 말을 아껴두고,
때로는 계획을 미뤄두며,
때로는 자신을 위한
빈자리도 마련해서 두고 싶다.
그래야 바람이 지나가고, 볕이 들고,
따뜻한 사람이 머물 것이다.
여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숨을 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