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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완

(9)
저녁 창틀을 타고 오르던 한 줄기 빛이휘청이며 조각난 파편으로 흩어질 때,누군가의 숨소리가 지나간 자리.닮아있는 무늬는 얇은 장막처럼 떨리고,투명한 무게의 고요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저녁은 언제나 그렇게 찾아왔다.의자 다리에 걸친 달빛의 균열,이야기가 끝난 책장 틈새의 한 줄기 초라한 빛,그리고 기울어진 시소처럼흐릿하게 가라앉는 시간.시간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텅 빈 유리잔의 고독 같은 허전함이 남는다.오직 흘러내리는 빛의 조각들과허공에 흩어진 무늬들만이조용히 머물며 끝내 사라질 줄 모른다.너는 묻는다.저 시간이 머문 끝에서 무엇이 들리느냐고.나는 말하지 않는다.대답은 언제나잊힌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있다.그곳은 너와 나,그리고 사라지는 것들로 가득 찬 고요의 공간.침묵은 더 깊어지고 어둠은 빛의 잔해를..
바람의 손길 바람은 쉼없이 흐르며 세상을 떠돈다.누군가는 서늘하다 말하고,누군가는 그저 지나간다며 무심하다.그러나 그는 안다.아직 피지 못한 꽃들이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음을.어둠이 자란 자리엔 잿빛이 앉는다.고통은 자주 무게를 숨기고,그 아래에서 작은 씨앗들은그의 따스한 숨결에 부풀어 오른다.아직 열리지 않은 시간 속에희망의 여운이 담겨 있음을 그는 느낀다.너는 어디로부터 왔는가.네 어깨를 타고 흐르는 한숨은얼어붙은 강의 길을 닮았고,마주치는 눈빛엔 맑은 물방울이 얼비친다.거기서 사랑이 시작될 것이라 그는 속삭인다.“힘껏 살아온 네게 꽃을 보낼 날이 있으리라.”바람은 흘러 다시 머문다.뒤돌아본 길 위엔 이름 모를 풀잎들이 자라나고,낙엽의 속삭임은 아쉬움이 아닌 기도로 변한다.아직 부르지 않은 노래들,아직 쓰지 않은..
부재 손끝에 감긴 시간이 마치 한 겹의 나이테처럼의미를 흘려보낼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사라짐은 닿지 못한 자리로부터 시작된다는 걸.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물웅덩이를 마주한다.너의 이름이 파문처럼 번질 때 그 기억의 중심에는언제나 부재의 색이 자리했다.너는 나의 반대편에 있었다.빛과 어둠의 경계, 무지개의 그늘진 이음새에서서로를 모르면서도 닮아가는,모호한 선율로 울리는 경계.어느 날, 물웅덩이에 비친 잿빛 하늘이너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흩어진 빗방울 속에서 나는 네 이름을 접었다.네가 있는 하늘은 몇 색으로 물들었을까?잎사귀 하나, 떨어지지 못한 채 바람 속에 걸려 있다.그 무게는 얼마나 될까, 사라질 순간을 담고도 휘어지지 않는 그 가지의 망설임.기억은 늘 음표처럼 남아침묵 속에서도 선율이 된다.이제 나의..
바람과 나무 길 끝은 아득하다.돌아보는 순간, 더 멀어진다.바람은 지나온 계절의 내음을 품고,누군가의 낡은 추억을 일으켜 세운다.나뭇잎들은 바람에 몰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자리를 찾는다.어제의 녹음은 오늘의 황혼으로 누웠고,회귀하는 몸부림 속에누군가의 발걸음에 밟혀도 서럽지 않다.그들은 무엇을 꿈꾸었을까.바람은 긴 손끝으로 그들의 등을 쓸어내린다.비는 천천히 부드럽게 내리는데왜 가슴 속엔 빠르고 거칠게 박힐까.이 세상의 아픈 모든 눈물도비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을 수 있을까.젖은 대지는 아직 마를 준비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대지는 울지 않는다. 대신 젖을 뿐이다.그 젖음은 비의 무게를 흡수하며,부서진 것을 다시 이어주고사라진 것을 다시 불러들인다.나무는 흔들리며 서로에게 다독이고,꽃은 꺾이면서 또다시 피어오른다.모든 것..
비탈길 가파른 언덕길 그림자 아래,비탈은 무늬 없는 천으로 그려진다.발끝은 모호한 언덕을 짚고서서,손끝으로 흔들리는 바람의 결을 쫓는다.사람들 모두는 자신의 경사를 짊어지고 간다.부서진 상실, 가라앉은 허무, 모두가 그 안에 갇혀있다.한때는 낯선 비탈이 서로 겹쳐촛농처럼 흐르던 밤이 있었다.불꽃이 속삭이던 언어,그 언어가 조용히 꺼져가던 순간.그리고 또다시,우리는 고통스러운 돌덩이를 굴린다.다시금 올라갈 이유를 찾으며.비탈을 오르는 걸음마다 미완의 의미가 박힌다.파편처럼 흩어진 존재의 이유가,때론 날카롭게, 때론 부드럽게 가슴을 뚫는다.그곳에 피어나는 생채기,그 속에서 쉼 없이 호흡 하는 것.어느 날,우리 모두 유성처럼비탈 끝 하늘을 그을리며 사라질 것이다.하지만 그 순간에도 발끝에 남겨진 흔적은흐릿한 빛으로나..
인연 구름 풀어진 하늘이 뜨거웠던 무렵,그가 다가왔다.얼굴을 마주 대했으나,내 속에 묻어둔 옛이야기가낱말처럼 입술에 걸렸다.시간이 지나자,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그가 지나온 길은 내가 헤맸던 숲과 같았고그가 남긴 발자국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그는 고운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 미소 뒤에는너무 많은 것을 감춘 사람이었고나는 그걸 보지 않을 수 없었다.눈동자 너머, 무너지려는 집과불 꺼진 창문과 숲에 덮인 길.그가 내민 손은 따뜻했으나닿으면 모두 얼어버릴 것 같았다.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내 혀는 언어의 모서리에 걸렸고내 목은 침묵으로 목이 메었다.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마치 두 개의 거울이 마주 선 듯.겉모습은 다르지만,그 안에 박힌 균열의 무늬가 닮아 있었다.말하지 않았지만,상처가 상처를 알아본다는 걸..
심연 길고 긴 둑길 위, 검은 잔재의 어둠이 깃드는 시간. 황금빛 나팔의 울림은 이제, 세월에 걸린 나이 든 울림으로 남았다. 그곳에 서면, 머릿속은 지끈거리고 발 아래 구멍 난 시간이 아찔하게 흘러간다. 꽃이 타고 남은 자리가 검은 심연이 되어 나를 집어삼킬 듯. 어떤 이는 말했지. 씨앗은 빛 속에서 무르익고 계절은 잊지 않고 되돌아온다고. 하지만, 잿더미의 기억은 스스로 길을 끊었다. 발을 내디딜 돌멩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저기, 검은 꽃자리들은 속삭인다. “우리는 안다, 돌아오지 못한 것들의 무게가 이 세상의 바닥을 얼마나 깊게 만드는지.” 나는 발끝에 다짐을 묻는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벗어나야 한다고. 그러나, 도약은 어딘가로 향하지도 못한 채 공중에서 스러지는 날갯짓만 하고 있다. 밤이 내리..
바람의 침묵 길을 걷는 이들의 발끝엔 바람에 쓸려온 침묵이 묻어있다. 그들의 그림자는 땅에 무겁게 매달리고, 발치마다 어둠의 파편들이 조용히 울음을 삼킨다. 묻고 싶지만 묻지 못한 말들은 목구멍 끝에서 자라난 가시처럼 아무리 삼켜도 쌓여만 간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바람은 다만 스쳐 가며 속삭인다, “너는 왜 너를 그렇게 묶으려고 하는가.” 그러나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고 바람 또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단풍잎은 한숨처럼 날아올라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어디선가 또다시 흔들리며 떨어진다. 떨어진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붉게 물든 기억의 조각뿐. 그 조각들 속에는 가사 없는 노래가 흐른다. 밤이 오고, 서리는 은빛 손톱으로 잠든 마음을 톡톡 건드린다. 그 단단하게 묶여있는 매듭들, 숨이 막히도록 조이고 있는 감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