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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소낙비

하늘이 섬광을 번뜩이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은실처럼 팽팽히 당겨진 전깃줄 위에서
참새 몇 마리가 놀란 듯 흩어졌다.
그리고 이내 우르릉 쾅.
천둥이 땅속 깊은 곳까지 울리고,
하늘은 감정을 쏟아내듯,
한 줄기 망설임도 없이 빗물을 쏟기 시작했다.
장대처럼 곧고 단호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땅 위로 떨어지는 그 물기둥들 사이에서
나는 황급히 정자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눌러온 울음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이의 숨결처럼
조급했고, 맹렬했다.
비는 경고하지 않는다.
살면서 맞닥뜨린 수많은 감정들,
예고 없는 슬픔, 이유 모를 눈물, 가슴속 울컥함,
모두 그런 식이었다.
억눌렸던 감정이 허공을 뚫고 내리는,
그것은 소낙비였다.

비는 때때로 기억의 문을 부드럽게 두드린다.
흙비 냄새 사이로 스며든 오래된 장면 하나.
국민학교 운동장,
맨발로 흙탕물을 튀기며 달리던 아이들.
갓 피어난 민들레 위에 떨어지던 빗방울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까르르 웃음을 던졌고,
그 웃음은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생명처럼 투명했다.
엄마는 내 등을 수건으로 감싸안으며
"감기 들겠다, 얘야" 하셨지만,
나는 소금기 머금은 바다 내음 같은
짜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 참 좋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비가, 나중엔 두 번 다시 맞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살아오며 나는 얼마나 많은 소낙비를 맞았던가.
이별, 실패, 외면, 후회
그 모든 감정은 언제나 기척 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늘 그 자리에,
비를 맞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산을 펼 새도, 피할 여유도 없이
그저 흠뻑 젖으며 나는 삶에 씻겼다.
비는 언제나 멈췄다.
그리고 그 뒤엔,
이상하리만큼 투명한 고요가 찾아왔다.

어쩌면 인생이란
크고 작은 소낙비들의 연속일지 모른다.
때로는 세차게, 때로는 조용히 스며들며,
마침내는 고요 속에 우리를 앉힌다.
그 고요한 순간에야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삶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임을.
모든 고통은 일시적이며,
햇살은 언제나
구름 뒤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소낙비는 잊힌 이야기처럼
불쑥 찾아와 묵묵한 위로가 된다.
세상은 그 격렬함에 움츠러들지만,
그 안에는 삶의 껍질을 벗기고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조용한 힘이 있다.
나는 그 힘을 안다.
복잡하게 얽힌 마음의 실타래가
빗물 속에서 하나둘 풀려나갈 때의 기적.

비는 어쩌면, 잊힌 이야기의 복원일지도 모른다.
말보다 깊은 위로.
그 짧고 격정적인 퍼부음 속에,
우리는 일상의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자신의 심연을 마주하게 된다.
빗소리는 내면을 두드리는 투명한 망치 같다.
뒤엉킨 감정의 실타래들이
물속에서 천천히 풀려간다.
그리고, 문득.
비가 그친다.

세상은 깨끗하게 씻겨 나간 듯하다.
물기를 머금은 거리는 거울처럼 하늘을 반사한다.
모든 것이,
갓 세수를 마친 아이처럼 순하고, 뽀얗다.
젖은 나뭇잎은 햇빛을 받아 새 떡처럼 윤이 나고,
대지 위에는 갓 태어난 공기가 숨을 고르고 있다.
들판은 한껏 물을 머금은 채,
조용히, 생명을 품는다.
그 고요는 하나의 진실을 품고 있었다.
삶은 소낙비와도 같다는 것.
쏟아지고, 흐리고, 헝클어뜨리지만,
결국 모든 것을 맑게 닦아낸다는 것.
진흙탕 같은 시간도, 폭풍 끝의 침묵은 아름답다.
그 침묵은 우리를 다시 쓰게 하는 백지다.

세월은 늘 짐을 얹는다.
사랑도, 후회도, 오해도
소낙비처럼 불쑥 내리쳐 우리를 멈춰 세운다.
하지만 시간은 바람이 되어 구름을 걷어내고,
마침내 고요를 불러온다.
그 고요는 모든 감정의 끝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들꽃.
작고 단단하고, 무언가를 견뎌낸 향기를 품는다.

나는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젖은 바람을 맞는다.
흙냄새와 잎새 향이 진하게 피어오른다.
소낙비가 씻고 간 세계.
그 위에 쌓인 기억.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는 지금, 이 순간의 평온.
이것이 어쩌면, 삶의 본질일지 모른다.
고요한 수면 위로 조용히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우리 삶도 결국, 고요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비에 흠뻑 젖은 도로를 따라 자전거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간다.
은빛 바큇살에 햇살이 걸려 반짝인다.
나는 다시 길을 걷는다.
젖은 운동화 안에서 물이 찰박거린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지금은 하나의 음악처럼 들린다.
모든 것이 멈췄던 그 순간 이후,
삶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러나 분명, 조금은 더 맑아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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