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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검은 유혹

처음이었다.
도서관 한쪽 편, 형광등 불빛 아래서
새벽을 견디던 어느 밤.
텅 빈 정적 속, 잠들었던 신경세포들이
슬며시 깨어나는 듯했다.
입술에 닿는 온기,
혀끝을 감싸며 퍼지던 씁쓸한 쾌락
그 순간, 감각은 세차게 일렁였고
세상의 소음은 마치 유리창을 닦은 듯 선명해졌다.
무뎌졌던 문장이 별빛처럼 반짝였고
단어들은 하나의 악보처럼
질서 있는 흐름으로 읽혔다.

그건, 유혹이었다. 작고 검은 유혹.
커피라는 이름의 마법.
그것은 내게 ‘집중’이라는 신기루를 선물했다.
하지만 모든 유혹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날 이후, 나는 커피를 기억했다.
하루의 시작은 늘 그 한 잔으로 열렸고
처음엔 일을 위한 동료였던 그것이
어느새 일상 속의 숨결이 되었으며,
그 일상은 조용한 중독으로 나를 침범했다.
나는 묻는다.
이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일까?
각성의 이름을 쓴 착각을
되풀이해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커피는 사람마다 다르게 스며든다.
누군가는 한 잔에도 잠 못 들고,
누군가는 다섯 잔을 마셔도 평온하다.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그 차이는 때로 커피의 보편성 속에서 잊힌다.
우리는 충분히 자문하고 있는가?
우리 몸이 내미는 신호에
제대로 귀 기울이고 있는가?

가을의 문턱이 열릴 무렵,
강릉에서는 해마다 커피 축제가 열린다.
커피의 생산지도 아닌 도시에서
축제를 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향긋한 축제가 거르지 않고 찾아온다.
다만, 골목마다 스며드는 원두 향기와
연금술사 같은 바리스타의 손놀림이
이 도시의 바다 내음과 어우러질 때,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문화이자 예술로 거듭난다.
그러나 나는 그 화려한 향 뒤에 묻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기념하고 있는가?
커피 그 자체인가,
아니면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의 목마름,
욕망, 허기인가?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커피 소비국이 되었다.
아침이면 빌딩마다 테이크아웃 잔을 든 채
출근하는 직원들이 많아지고,
점심 후 커피 한 잔은 일상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야근이 예고된 저녁엔
짙은 다크로스트가 위안처럼 요청된다.
커피는 어느새 ‘효율’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일터를 돌아다닌다.

“커피 없이는 하루를 못 살아.”
그 말 안에는 피로와 체념,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도시의
슬픈 리듬이 숨어 있다.
커피는 때때로 시의 한 구절 같고
작은 쉼표 같지만,
그 이면을 직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소비는 습관이 되고, 습관은 무감각을 낳는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는가,
아니면 커피에 마셔지고 있는가?

요즘 나는 차를 마신다.
다소 심심하고 조용한 그 맛이
오히려 내게는 위로가 된다.
차는 기다림의 온도이고,
침묵이 스며드는 시간이다.
나는 찻잔을 들고 바깥바람을 느끼며
조용히 호흡을 쉰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저 스며든다.
커피가 도시의 심장이라면,
차는 숲의 심호흡이다.
우리가 진정 필요한 것은 눈부신 각성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서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한 모금의 차,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듣는다.
세상의 속도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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