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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말벗이란

어느 조용한 저녁이었다.
바람도 말을 아끼고,
하늘조차 감정을 삼킨 듯 무표정했다.
나는 찻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말벗이란, 말을 많이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아닐까 하고.

세상은 끊임없이 말한다.
광고는 외치고, 방송은 쏟아내며,
화면 속의 누군가는 한시도 입을 쉬지 않는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말들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외롭다.
어쩌면 우리는 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말에 쫓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벗이라는 단어가
내겐 더 이상 '대화의 상대'가 아닌,
'고요 속에서도 곁에 머물 수 있는 존재'로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말벗은 곁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의 안쪽에 머무는 사람이다.
요란한 수식이 아니라,
가만히 어깨에 기대어도 무너지지 않을
묵직한 기둥 같은 사람.
때로는 말없이 앉아 등을 돌려도,
그 침묵 속에서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사람.
말벗이란, 그런 존재다.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유창한 말솜씨나 유머,
끊임없는 대화가 좋은 말벗을 만든다고.
하지만 진정한 말벗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말의 무게를 짐작하고,
말을 다 하지 않아도
끝까지 듣는 자세를 지닌 사람이다.
그에게는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는다.
마치 가을 햇살처럼 따뜻하고도 조용하게.

비단 사람만이 말벗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나무 한 그루,
묵묵히 계절을 견뎌온 고양이 한 마리,
해 질 무렵의 그림자도
어떤 날엔 좋은 말벗이 된다.
그들은 다만 존재함으로써 나를 위로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말 없는 위로가 말 많은 위로보다 깊을 때가 많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말벗은 결국 ‘허물없이 살아가는 관계’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서로를 포장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흉금을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어떤 날엔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좋고,
또 어떤 날엔 한마디만으로도
세상을 다 이야기한 듯 가벼워지는 관계.
그것이 바로 진정한 말벗의 모습일 것이다.

말벗이 된다는 건,
누군가의 슬픔에 곁을 내어주는 일이다.
그의 기쁨을 내 일처럼 웃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내게도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위로나 관심,
감정노동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마음이
자연스레 오고 가는 것.
그 속에서 말벗은 탄생한다.

내가 기억하는 말벗은 청소년 시절,
도서관에서 마주 앉았던 친구였다.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 종종 그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책을 읽곤 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빙그레 웃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젖은 우산을 말릴 틈도 없이
함께 걸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침묵에서 위로를 배웠고,
그의 조용한 웃음에서
세상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평화를 느꼈다.

그 이후로 나는 말벗이란
‘말을 많이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침묵을 공유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도 좋지만,
굳이 털어놓지 않아도 이미 알아주는 관계라면
더없이 이상적이다.
말은 때때로 진심을 가리고,
침묵은 때로 진심을 드러낸다.

삶의 무늬는 시간과 더불어 짙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말보다 눈빛에 익숙해지고, 눈빛보다 마음에 더 가까워진다.
요란한 말보다 조용한 숨결이 더 신뢰를 주고,
오래된 침묵이
가장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하다.
그 속에서 진정한 말벗은
더 이상 ‘대화’라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해’라는 방식으로,
‘공존’이라는 상태로 머문다.

진정한 말벗은 허물없고, 담백하며,
때로는 무심한 척하며 곁을 지켜준다.
그 사람 앞에서는 굳이 잘난 척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 있는 시간이 침묵으로 가득해도,
그 침묵은 절대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내면의 울림으로 가득 차 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네가 조용할 때, 엄마는 더 많이 네 마음을 느껴.”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세상과의 말 속에서 길을 잃고 있을 때,
누군가는 내 침묵 속에서 나를 찾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말벗의 진정한 의미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무엇이든 말하지 않아도, 그저 곁에 있음으로써
서로의 안부가 확인되는 관계.

말벗은,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잃어버리고 마는,
그러나 평생을 두고 다시 찾아 헤매는,
하나의 귀소본능과도 같다.
고요한 날,
우연히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바로 그 존재가,
지금, 이 순간 나의 말벗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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