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단상
새벽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어김없이 찾아온다.
오늘도 그랬다.
깊은 잠결을 스미는 듯한 기척,
눈꺼풀 너머로 달빛이 커튼 사이를 누비며
방 안을 은빛으로 적시고 있었다.
그 빛은 오래된 기억처럼 부드러웠다.
마치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잠든 내 볼을 만져주던 손길처럼
조용하고 다정했다.
나는 이불을 걷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새벽의 공기는 젖은 이끼의 향과
시든 풀잎의 숨결을 가만히 안고 있었다.
달빛은 어둠의 가장자리를 침범하며
희미한 푸른색으로 밤의 윤곽을 더듬고,
그 안에서 낡은 기억들이 먼지처럼 일어났다.
부유하는 장면들.
가물거리는 추억의 조각들이 고요히 말을 건넨다.
기억이란 언제나 시간을 거슬러 걷는다.
한 번도 앞서지 못하고,
결코 미래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우리가 남긴 발자국을 조심스레 더듬는다.
나는 지금, 겨울을 맞는 나무처럼
조금씩 마음의 잎을 떨구는 법을 배우고 있다.
가지 끝에 남은 마지막 잎을
조용히 데려가는 바람의 손길을 기다리며,
비워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가 품은 추억들은 결국,
머물던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온기였는지도 모른다.
삶은 때로, 찬란한 이별의 연속이다.
모든 지나감 속에서 남는 것은
그것이 ‘존재했음’에 대한 조용한 경이다.
한때 나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책 속의 구절에서, 영화의 엔딩에서,
누군가의 손길 안에서 영원을 꿈꾸었다.
하지만 결국, 꽃도 지고, 여름도 사라지고,
사랑조차 마치 앓던 열병처럼 지나간다.
지나간다는 사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금의 순간을 붙잡는다.
며칠 전, 친구의 부고를 들었다.
삶은 그렇게 예고 없이 옆자리를 비운다.
마지막 인사를 남길 틈도 없이.
삶은 계속 흘러가고, 우리는 그 등을 바라본 채,
무언가를 놓친 채, 조금씩 더 조용해진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사진을 남기고, 일기를 쓰고,
오래된 옷가지나 편지 한 장을
서랍 깊숙이 간직해둔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바랜다.
기억은, 망각의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문득 상상해 본다.
삶이 하나의 필름처럼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디에서 멈추고 싶을까.
아버지가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리던
강둑의 봄날일까.
빗속에서 첫사랑의 눈을 바라보던 젊은 오후일까.
그 모든 순간은
다시 닿을 수 없지만 사라지지 않는 이정표.
뒤돌아볼 수는 있어도
다시 걸어갈 수는 없는 길목의 풍경들이다.
어느 날엔가, 나도 그렇게 사라지겠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오후.
창밖 나무 위로 매미가 울고,
싱크대에 물이 고이고,
오후 세 시의 빛이 벽지 위에 얼룩을 만들고,
나는 아마도 아주 작게,
조용히 숨을 거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괜찮다.
내 일부는 어디에선가
작은 파편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사진과 그림,
조금이나마 흔들리게 했던 내 글귀,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 한 귀퉁이에
잠깐이라도 머물렀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달빛은 천천히 기울고 있다.
나 또한,
그 빛처럼 조금씩 기울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은 아름답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흐르는 시간 속에 살짝 멈춰 선 이 찰나.
숨결처럼 덧없는 삶이기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진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해야 할 이유를 가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