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표현한 시
삶은 때때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탁자 한 모서리에 무심히 방치될 때가 있다.
그날의 나는,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복지관 가곡 반 수강에 대해 문의했을 때
“일단 참여해 보시고 결정하세요”라는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이미 서랍 뒤쪽에 넣었다.
낯선 사람들과의 어울림도,
노래라는 낯섦도,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
하지만 용기를 내 가곡 반에 처음으로 참여하던 날,
지도 선생님의 피아노 첫 음이 들리자,
내 안의 닫힌 문 하나가 조심스레 열렸다.
그 음은 마치 오래된 마음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돌려 여는 손길 같았다.
젊은 시절 이후 수십 년 만에 가곡을 부르게 되었다.
시를 품은 음악,
아니, 음악이 품은 시를.
가곡과의 만남은
단지 노래를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인을 만나고,
작곡가와 숨을 나누는 일이었다.
시인이 삶을 노래하면,
작곡가는 그 노래에 날개를 달아 하늘로 띄운다.
그렇게 가곡은
단어로는 담기지 않는 마음의 심연을,
선율 위에 피워낸 시가 된다.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가사의 첫 마디가 시작되자,
내 안에 묻어둔 풍경들이 찰랑이며 솟구쳤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듣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바로 그 노래.
먼 시간의 안개를 뚫고,
그 멜로디가 내 앞에 다시 피어났다.
노래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이었고, 향기였으며,
따뜻한 체온이었다.
가곡은 일상의 언어로는 담기 어려운
감정의 골짜기를 건너게 한다.
불현듯, 나는 작사가인 시인을 떠올렸다.
내면의 절절한 감정을
어떻게 그렇게 고요하고도 뜨겁게
써 내려갈 수 있었을까.
또 그 시에 선율을 얹은 작곡가는
얼마나 정결한 영혼을 가졌기에
그렇게나 섬세하게
마음의 선율을 다룰 수 있었을까.
나는 그날, 그들의 마음을 만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이
그들의 시와 음악을 통해
비로소 나를 마주한 것이리라.
시인은 고백하듯 써 내려간 말들 속에
희망을 숨겨두었고,
작곡가는 그 희망을 노래가 되어 퍼지게 했다.
그들이 남긴 그 한 줄의 시와 한 줄의 음은,
내 삶의 어두운 골목에서 등불이 되어주었다.
이제 나는 안다.
삶이 아무리 고되고 캄캄해도,
마음속에 단 한 줄의 노래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빛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곡 중에 익히 들어본 제목의 곡들도 있었다.
피아노 반주와 함께 선율이 흐르자,
가사의 첫 문장이 내 마음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오! 떠나는 배..."
익숙한 가곡이 울려 퍼지자,
마치 내 삶을 훔쳐본 듯한 가사가
마음에 스며들었다.
거센 바다 위로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버티는 삶을 살아온, '이름 없는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작사한 시인과, 그 시에 생명을 불어넣은 작곡가,
그리고 같이 노래를 부르며 숨결을 맞추는 반원들.
우리는 저마다의 바닷가에 서 있었지만,
한 곡의 노래가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며 나는 내 삶을 들여다보았다.
무채색으로만 칠해진 듯한 나날에,
가사의 단어 하나,
선율의 곡절 하나가 색을 불어넣었다.
‘외로움’은 ‘사색’이 되었고,
‘그리움’은 ‘따스함’이 되었다.
노래는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잊고 지냈던 질문을 건네주었다.
“나는 어떤 바닷가에 서 있었는가?”
“지금 내 삶은 어떤 음계로 흐르고 있는가?”
노래는 정직했다.
발성과 호흡, 감정과 진심.
모든 것이 그대로 울림이 되었다.
부를수록, 나는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를,
얼마나 조용한 위로를
갈망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을 울린 곡은 '비목'이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노래가 끝나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것은 단지 계절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산화한 젊은 넋들을 위무(慰撫)하는
통곡의 노래였고,
6월의 산하에 울리는 묵시록이었다.
잊힌 이름 하나하나에 바치는 애도의 기도였다.
노래는 과거를 되돌리진 못해도,
그 과거에 따뜻한 조명을 비춘다.
아픔을 지우진 못해도,
그 아픔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복지관의 그 소박한 모임은
어느새 나에겐 성소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 숨결, 웃음 속에서
나는 세상의 온기를 배웠다.
그곳에서의 노래는, 지나가는 시간이 아닌,
새롭게 해석되는 삶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노래란, 우리가 아직 버리지 않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그 어떤 글보다, 그 어떤 말보다
깊이 닿는 진심이라는 것을.
그래서 요즘 나는
종종 혼자서도 노래를 흥얼거린다.
창밖을 바라보며, 골목길을 걸으며.
음정이 조금 틀려도,
고음이 올라가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노래가 내 마음의 소리라는 것이다.
이제 가곡은 내 삶의 일부가 될 것 같다.
시인은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작곡가는 그 말에 멜로디를 얹어서
내 마음에 날아들게 했다.
그들은 내가 직접 만난 적 없는 사람이지만,
나를 위로하고 웃게 만든 진정한 동반자였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안의 언덕 위에서 노래한다.
그리고 바란다.
이 노래가 누군가의 가슴에도 조용히 스며들어,
삶의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