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기억
강물은 언제나 되돌아오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만, 모든 것을 잠식하며 흘러간다.
오늘, 강가에 홀로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니
말없이 흘러가고 있는 건 강물이었고, 나였고,
시간이기도 했다.
강물은 흐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모든 것은 흐른다(Panta rhei)"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라고 했다
시간은 되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만 그 모습이 아른거릴 뿐이다.
나는 오늘도 이 흐르는 강 앞에 앉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나를 동시에 바라본다.
처음엔 그의 말들이 무심히 들렸지만,
살아갈수록 그 말은 무게를 더해갔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흐른다.
기억처럼, 숨처럼, 강물처럼.
지금 내 곁을 지나가는 이 물줄기 역시
한순간도 같지 않다.
그 위로 어릴 적 웃음소리와 젊은 날의 고독,
잊힌 사랑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떠다닌다.
나는 그 위에 앉아, 나의 생을 되짚는다.
내 유년의 기억은 작은 돌멩이처럼
강바닥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
어떤 날은 그 돌멩이 위로
햇빛이 스며들어 반짝인다.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간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 흐름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것은
바로 '기억'인지도 모른다.
기억은 시간을 붙드는 문학의 손이다.
프루스트는 마들렌 향기를 통해
잊고 있던 시간을 되살렸고,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순간들을 잡아내려 했고,
보르헤스는 “시간은 거울이며, 미로이며,
잊히는 모든 것의 이름”이라 말했다.
문학은 시간을 붙들지 못한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강의 표면을 어루만질 수는 있다.
수필 한 줄, 시 한 구절,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바로 그 강물 위에 띄운 기억의 조각배다.
지금도 나는 나의 문장을 띄운다.
돌아오지 않는 시간 위로,
다시 한번 나를 건네기 위해.
시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뉴턴은 시간을 절대적인 무대라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에서 말한다.
"시간은 관측자의 위치와 속도에 따라 달라지는 환영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허구인가.
사람들은 하루 24시간이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고 믿지만,
사랑에 빠질 땐 1시간이 1초 같고,
이별 앞에선 1초가 영겁과 같다.
시간은 언제나 감정의 옷을 입고
우리 곁을 스쳐 간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감정을 살아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는 순간은,
영원의 가장자리에 깃든 불꽃이다.
존재는 항상 '지금'에만 머무른다.
어제는 기억의 유령이며,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 망상이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후회에 사로잡히고,
미래의 불안에 떨며,
지금 이 강물의 반짝임을 잊는다.
하지만 강은 언제나 현재만을 흐른다.
지난 물줄기를 붙잡을 수 없듯,
다가올 파도를 앞당길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흐름 위에 존재하기로 한다.
찬란한 햇살이 수면을 어루만질 때,
그 반짝임 하나하나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간을 견디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다.
나는 이제 안다.
시간은 나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것이다.
흐름 속에서 나는 나였고, 나는 곧 강이며,
시간 그 자체였다.
그러니 오늘, 나는 강가에 문장을 띄운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위해,
기억으로 남겨질 모든 순간을 위해.
끝내 시간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측정하고, 노래하고,
기억하고자 할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진정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금 여기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한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도 흐르되,
그 흐름을 느끼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시간과 함께 걷는 삶의 의미 아닐까.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나 기억은 머문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