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기별 없는 바다를 사랑하다

이 얀 2025. 6. 17. 06:37

멀리 있는 것들이 나를 불렀다.
흐르지 못한 것들이 나를 붙잡았다.
오지 못하는 것들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사랑은 오지 않는 것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물결은 닿지 못하는 것들을 향해 매번 출렁인다.
닿을 수 없다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물은 끝끝내 흐른다.
나는 그 물가에 오래 앉아 있었다.
손에 닿지 않는 바다를, 부르지 못하는 이름을,
그 물줄기는 내게서 멀어진
‘너’에 대한 바다의 회답처럼
매번 다른 소리로 속삭였다.

개천은 바다를 모르지만,
바다는 개천을 알고 있다.
그 말 없는 연모처럼,
밀물은 깊은 숨을 들이마셔
이 물가까지 와 닿는다.
이름도 없이 무명처럼 흐르다,
끝내 바다로 닿는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바다의 그림자가,
이 작고 얕은 물줄기에 스며 있다.
갯벌도 없고 파도도 없는 이 내륙의 물길에,
바다의 냄새가 어렴풋이 감돌 때가 있다.
그것은 실상보다 기억에 가까운,
사라진 기척의 냄새였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이 내륙의 얕은 개천은,
해안의 몸짓을 알 길 없으면서도
매번 몸을 낮춰 그 손짓을 받아낸다.
바다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바람과 소금기와 불현듯 일렁이는 수면으로
그 기별을 전한다.
그 조용한 사모(思慕) 속에,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는 너에게 온전히 닿은 적이 없지만,
마음의 밀물은 언제나 너를 향해 밀려들었다.

내가 머무는 이 물가에선,
갈대들이 바람에 자주 몸을 기울인다.
그 구부러짐은 복종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뿌리 뽑힐 만큼 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사랑은 그런 것 아닐까.
뽑히지 않으면서 꺾이고,
무너지지 않으면서 낮아지는 것.
너에게 가닿을 수 없는 이 거리에서,
나는 스스로를 갈대처럼 휘게 한다.
낮은 물소리에 귀를 대며,
혹시 네가 나를 부르는
기척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온 몸을 곤두세운다.

닿을 수 없는 바다를 기억하며
한 치 한 치 밀려오는 조류처럼,
‘너’는 내게 언제나 가닿지 않았다.
물결은 이따금 감각의 틈을 타
내 마음 안쪽까지 스며들지만,
끝끝내 만져지지 않는다.
이 물줄기엔 바다의 약속이 깃들어 있고,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더 깊고 또 아리다.
너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네 깊은 바다는 내게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너는 나에게 늘 이인칭이었으나,
때때로 삼인칭처럼 멀게 느껴졌다.
부르면 대답하지 않는 거리,
돌아보지 않는 그림자,
내가 바라보는 모든 방향에 있으나
그 어디에도 없는 존재.
너는 사라진 메아리였다.
나는 내 안에서 소리쳤고, 내 안에서만 들렸다.
그 침묵의 경계에 다다를 때마다,
내 사랑은 말라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라간 자리에 또 다른 물길이 솟았다.
사랑은 그렇게 번역되지 않는 감정,
이해되지 않는 언어로 계속 흘렀다.

밤이면, 나는 물가로 돌아왔다.
썰물이 지나간 자리에 갯벌이 드러나고,
그 질척한 땅 위를 새들이 뒤적였다.
빈껍데기처럼 남은 조개무더기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지난다.
그 바람에 나는 네 이름을 태운다.
닿지 못할 이름, 부르지 못할 사랑.
언어는 이미 퇴색했고,
나는 침묵으로 말해야만 했다.

물러나는 물처럼, 나는 너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밀려드는 사랑처럼
나는 다시 돌아간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 흐름 안에서,
나는 비로소 사랑의 본질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랑은 닿는 것이 아니라,
닿고자 하는 몸짓이다.
그것이 닿지 않을 때조차 계속되는 고백이다.
멈추지 않는 흐름이다.

내 사랑은 바다의 기별이었다.
아주 멀리서 밀려와,
작은 개천의 모퉁이를 적시고 스러지는 물결.
바다는 모른다.
내가 이 물가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앓았는지.
그러나 나는 안다.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물가에도,
바다는 분명히 와 닿았다고.
그리고 너 역시 내게 열어주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안을 지나간 바람이었다고.

사랑이란 본디 혼잣말에 가깝다.
바다는 하천에게 아무 기별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하천은 매일같이 바다를 향해 흐른다.
소금기 하나 없이도,
파도 한 줄 없이도, 그저 흐른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개천 앞에서 오래도록 물을 들여다보았다.
깊지도, 맑지도 않은 그 물 속에,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흐르는 것이 사랑이라면,
멈추는 것도 사랑이었다.

오늘도 나는 이 마른 물가에서,
기별 없는 바다를 사랑한다.
아무런 약속도, 목소리도, 손길도 없이,
오직 흐르는 마음만으로.
언젠가 그 마음이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다만 흐를 뿐이다.
사랑은 결국,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