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하게 가는 달력
오래된 노트 한 권을 찾았다.
헤진 표지, 누렇게 얼룩진 종이.
페이지마다 희미하게 바랜 볼펜 자국,
그리고 빗겨 써 내려간 글씨들.
언젠가 쓴 생일, 기념일,
노트 사이에 끼워진 영화 티켓이며,
누군가와 나누었던 짧은 메모들이
스멀스멀 기억의 창을 두드린다.
오래도록 무심했던 시간이
그 속에서 말없이 꽃처럼 피어난다.
세상의 모든 날은 무언가를 기념하거나
애도하거나 혹은 기꺼이 잊기 위해 존재한다.
어떤 날은 눈물로, 어떤 날은 웃음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 모든 날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언제나 비슷한 아침 햇살과
고요한 저녁 바람 같은 평범한 순간들이다.
희로애락이란 그 평범 속에 섞여,
시간의 농도로 서서히 우러나오는 차 한 잔과 같다.
그 뜨거운 잔을 다 마셔볼 겨를도 없이
우리는 또 내일을 향해 달려가곤 했지만.
젊은 날의 나는 늘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시간을 채근하듯 달력을 넘겼고,
손목시계는 나보다 앞서 늘 숨가빠 했다.
무언가를 놓칠까 봐, 누군가보다 뒤처질까 봐,
나는 언제나 바빴다.
하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것들.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진심,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 한 조각.
그런 것들은 번번이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잊히기 일쑤였다.
어느 날 문득, 멈춰 선 달력을 본 적이 있다.
계절은 봄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 달력은 여전히 지난겨울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래도록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마치 세월이 그곳에 머물러
무언가를 되새기고 있는 듯.
그날 이후, 나는 알 수 없는 평온을 느꼈다.
반드시 오늘을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하여 하루가 꼭 지나가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있다는 것.
그 느린 시간 속에 숨겨진 자유.
노년으로 접어드는 요즘,
나는 느긋한 생의 바다에 조용히 닻을 내리고 싶다. 파도는 여전히 밀려오지만,
그 파도에 관심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성공도 실패도, 지나간 날의 후회도
이제는 조용히 내 곁을 떠나가게 두련다.
무엇을 더 이루기보다는,
무엇을 더 사랑할 수 있을지 묻는 삶.
타인과 비교하는 경쟁의 무대가 아닌,
나만의 무대에서 나 자신과 조용히 춤추는 시간.
이제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밖 하늘을 먼저 본다.
흐린 날은 흐린 대로,
맑은 날은 맑은 대로 기분을 정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보다는
오늘 나의 마음이 어떤지를 먼저 묻는다.
커피를 마시며 어제 읽던 전자책의 문장을
천천히 되새기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며
늦은 햇살에 얼굴을 맡긴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오히려 내 안에서
잊고 있던 나의 조각들이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온다.
나는 이제 느릿하게 가는 달력을 갖고 싶다.
한 달이 몇 날이든,
계절이 몇 번 돌아오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하루하루를
얼마나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느냐는 것이다.
사라진 날들에 연연하지 않고,
오지 않은 시간 앞에 초조해하지 않는 것.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찻잔처럼 따뜻하고 고요한 시간을
온전히 음미하는 삶을 살고 싶다.
물론 때때로 아쉬움은 밀려온다.
더 사랑하지 못한 날들,
더 용서하지 못한 순간들,
그리고 더 나 자신답게 살지 못한
젊은 날의 그림자들.
하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하나의 색깔로 품고 가려 한다.
후회는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이고,
소망은 남은 시간의 등불이니까.
언젠가 내 삶의 달력도 마지막 장을 맞이하겠지.
그날이 오면, 내 방의 달력도
그달에서 멈출 것이다.
누구도 다시 넘기지 않을 달력.
하지만 그 안에는 수없이 빛났던 날들이 있다.
웃음이 가득하던 봄날, 눈물이 깊던 겨울,
사랑으로 따뜻하던 가을,
꿈을 품었던 여름이 있다.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내가 나에게 손뼉을 쳐준 날들,
슬픔을 이기지 못해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났던 날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 모든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천천히 반짝이며 늙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제 바란다.
누구보다 빠르지 않아도 좋다.
누구보다 높이 오르지 않아도 좋다.
다만 나답게, 나로서, 나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삶.
그 삶이야말로 노년의 미학이자,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