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역 뒷길에서
묵호역을 지나쳐,
사람의 발길이 뜸한 뒷길로
무심코 접어든 어느 오후였다.
이 길은 뜻밖의 시간이 숨어 있는 골목이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무심히 내 어깨를 스치고,
그 바람 끝에 실려 온 것은
짠 내음도, 해풍의 쓸쓸함도 아닌
오래된 사람들의 숨결이었다.
삐걱거리는 대문과 흙발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계단,
창살 너머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해묵은 화분들.
그 모든 것들은 어떤 풍경이 아니라,
한 시대의 체온이었다.
금이 간 회벽과 비바람에 바랜 간판들 모두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은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1970년대의 사진 속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먼지가 잔뜩 낀 거울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 골목의 집과 상가들은
오랜 벽화처럼 세월의 색을 입고 있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은 비에 젖어
더 어두운색을 띠었고,
벽돌은 일부러 떨어져 나간 듯,
거칠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허름함이 왠지 모르게 아름다웠다.
마치 오래전 흑백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듯,
집들은 망연히 서 있었고,
그렇게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나간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도 이와 비슷한 골목이 있다.
서울 외곽의 영등포,
비가 내리면 푹푹 빠지던 흙길과
밤이면 개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깨던 그곳.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끼고
함지박에 빨래하시던 마당,
그 어머니의 주름진 손
아버지가 연탄재를 털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던 겨울의 저녁.
그 시절은 모두가 가난했지만,
유독 감각의 기억은 선명했다.
연탄 냄새와 비누 거품,
그 사이로 숨어드는
소주 공장의 고구마 말리는 향기.
삶은, 그렇게 때로는 감각으로 기억된다.
손등에 닿던 겨울의 바람,
벽에 부딪히던 절망,
그리고 속절없이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들.
부끄럽고, 무력하고,
나 자신이 작고 하찮게 느껴졌던 그런 날들.
그때는 가난을 몰랐으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분명 결핍 속에 살았다. 그러나 바로 그 결핍이,
지금의 나를 키운 흙과 물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살면서 여러 차례 좌절의 벽에 부딪혔다.
사업에서의 실패, 질병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
누군가에게 건넨 진심이
무심하게 무너졌을 때의 허무함.
이 모든 경험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처럼
내 앞을 막았고, 때로는 숨 쉴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묵호의 골목을 걷다 깨달았다.
그 벽들은 단순히 나를 막기 위해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넘어설 수 있도록,
돌아설 수 있도록 거기 서 있었던 것이었다.
묵호의 골목길에서 마주한, 오래된 집들은
더 이상 ‘가난’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기다림’과 ‘버팀’의 모습이었다.
문고리에 묶인 비닐끈 하나조차,
누군가의 내일을 위한 작은 준비였다.
곧 떨어질듯 빛 바랜 낡은 간판,
창틀에 놓인 시든 화분,
흙 묻은 고무신 한 켤레.
모두가 한 삶의 의지였고, 사랑이었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좌절을 겪는다.
사랑의 부재, 능력의 부족, 신분의 한계.
어떤 때는 자신의 마음조차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이 골목길을 떠올릴 것이다.
오래된 것들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허름함 속에도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가난이란 반드시 수치의 낙인이 아니며,
오히려 견디고 이겨낸 자에게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선물해 준다는 것을.
묵호역 뒷길을 빠져나오자, 시야가 탁 트였다.
푸른 바다가 저 멀리서 부서지듯 빛나고 있었고,
찬란한 햇살이 내 어깨를 감쌌다.
아, 이 얼마나 큰 생의 아이러니인가.
그토록 쓸쓸하고 그늘진 골목 끝에,
이토록 눈부신 풍경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절망과 어둠의 끝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희망의 빛이다.
묵호의 뒷길은 그렇게 내게 말했다.
너는 아직 길 위에 있다고,
고된 삶의 그림자 아래에도 늘 빛이 숨어 있다고.
그리고 너는 그 벽을 기억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그 길을 걷고 또 걸어,
다시 한번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었다.
벽이 있기에 길이 있고,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
삶은 언제나 그렇게 균형을 이룬다.
좌절이라는 벽은 나를 가로막은 게 아니라,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조용한 친구였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묵호의 바람처럼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삶을 향해 걸음을 옮기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