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묵호 어시장 주차장 입구,
자동차 소리와
갈매기 울음이 뒤섞인 그 틈바구니에,
허리가 반쯤 접힌 할머니가
조용히 과일을 늘어놓고 있었다.
사과는 싱싱하지 않았고,
참외는 조금 기울어 있었지만
그 안엔 철 지난 계절의 온기와
버려지지 않은 마음 하나가 담겨 있었다.
봄볕이 발끝에서부터 등을 타고 오르고,
바닷바람은 사정없이 옷깃을 휘저었지만,
할머니는 마치 그곳에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바람에 들썩이는 낡은 종이 상자 위로
오후의 햇살이 비단처럼 내려앉고,
그 과일 하나하나엔
삶을 다듬어온 손길이 조용히 배어 있었다.
거기 놓인 건 상품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하루치의 마음이었다.
마치 자식에게 줄 소풍 도시락이라도 되는 듯,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하나하나 다듬고 닦은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할머니는 손을 흔들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단지 눈길을 들어 스쳐가는 얼굴들을 바라볼 뿐.
그 눈빛엔 '팔아야 한다'는 절박함보단,
‘누군가 다가와 주길’ 바라는
조용한 기대가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엔 조급함이 없었다.
할머니의 자리는 살기 위해 앉은 자리가 아니라,
살아온 나날을 건너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 안엔 계절들이 누적된
무게가 담겨 있었다.
비바람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손등의 거침,
말없이 건네는 눈빛 하나에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희망이란, 찬란한 성취의 이름이 아니라,
내일도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다는
작고 단단한 의지라는 걸.
나는 종종 그 자리를 지나쳐 걷는다.
할머니는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관광객으로 어시장이 소란스러워지는 주말은,
그 모습이 더욱 또렷이 빛난다.
묵호의 바람 속에 섞여 있는 한 사람의 삶.
그것은 곧, 우리가 잊고 있던
'존재의 깊이'를 말없이 들려주는,
작지만 눈부신 이야기였다.
세상엔 수많은 기다림이 있다.
병실 복도에서 의사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
긴 터널 끝에서 터져 나올 빛을 기다리는 사람,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
기다림은 언뜻 무기력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단단한 의지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오지 않더라도 매일 자리를 지키고,
언젠가 올지도 모를 손님을 위해
과일을 닦는 그 할머니처럼,
기다리는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빛이 된다.
어쩌면 인생은
‘절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을
기다리는 용기’에 달린 건 아닐까.
베케트가 말했던 고도가 끝내 나타나지 않듯이,
우리가 기다리는 그것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데도
우리가 무릎을 굽히지 않고 한 자리를 지킨다면,
그 순간만큼은 이미 우리 안에
희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닐까.
비 그친 오후,
할머니의 좌판엔 햇살이 내려앉았다.
희망은 어쩌면,
피어나지도 않은 꽃이 아니라
말라가는 꽃잎에서 다시 향기를 내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는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곧,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에.
때론 눈물처럼, 때론 햇살처럼 스며드는
그 기다림의 무늬 안에서, 삶은 비로소 빛난다.
고도가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우리가 있기에
이 세계는 아직 따뜻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