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마침표와 쉼표

이 얀 2025. 5. 30. 04:09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에 잠긴다.
수평선은 과연,
파도가 도달할 수 없는 종착의 마침표일까,
아니면 다음 물결을 위한 고요한 쉼표일까.
잔잔한 바다도, 성난 파도도
결국 같은 선 위에서 멈춘다.
그러나 바다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다음 물결은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인생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예고 없이 등장하는 마침표를 만나게 된다.
누군가 떠나고, 하던 일이 끝나며,
어떤 날은 시간이 멈춘 듯한 하루도 있다.
그날 우리는 삶의 한 줄 사연이
툭, 끊어졌음을 깨닫는다.
퇴직, 이혼, 사별
이 세 단어는 쓸쓸하고 아프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문장의 끝이 아니라
문단이 바뀌는 자리일 뿐이다.
절망의 어둠도, 공허의 깊이도
결국 다음 이야기를 위한 여백이다.

퇴직은 단순히 옷을 벗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을 내려놓고,
바람과 햇살의 감촉을 다시 기억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일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랜 침묵 끝에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것이다.

퇴직 후 소도시로 이사한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정장보다 더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 있다는 것을.
거울 속의 나는 타인의 비위를 맞춰가며 살던
과거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그건 잃어버린 정체성이 아니라, 되찾은 '나'였다.

이젠 누구도 내 직함을 불러주지 않는다.
그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축복이었다.
이름이 다시 나에게 돌아오던 순간,
나는 비로소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시작되었을 때,
인생은 마침내 진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혼을 실패라 부른다.
감점된 인생의 시험지처럼 여긴다.
하지만 나는 이혼을 ‘구두점’이라 부르고 싶다.
너무 긴 문장을 끊어야 비로소 의미가 살아나듯,
어쩌지 못했던 오래된 관계를 마무리해야
비로소 나라는 문장이 읽히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듯,
한때 ‘우리’였던 두 사람이
다시 ‘나’로 돌아가는 여정은
서툴고, 아프고, 무엇보다 고독하다.
그러나 상실은 때때로 가장 순도 높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실패라 말하겠지만,
자유로운 영혼과 조우 할 기쁨을 얻을 것이다.

이혼은 사랑의 폐허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 남긴 잔해 위에 세우는
조용한 기념비다.
어떤 사랑은 자신을 버리는 연습이 되고,
어떤 이별은 자신을 되찾는 선언이 된다.
상처는 날카로워 쓰라리지만,
그 틈새로 새살이 돋아나는 속도는
예상외로 빠르다는 걸 우리는 잊고 있다.

죽음은 가장 깊고 깊은 마침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다음 이야기를 쓰기 위해
펜을 잠시 내려놓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정지일 수 있으나, 완전한 침묵은 아니다.
남은 이들의 가슴에서
그 이름은 여전히 인용부호 안에 살아 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지…”
“그는 항상 그랬어…”
죽은 자의 언어는 끝나지 않는다.
기억이 그 문장을 다시 읽고, 되새기고,
때로는 새롭게 써 내려간다.
육신은 멈췄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쉼표로 이어진다.

우리는 가끔 삶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 부서짐은 소멸이 아니라 재편성이다.
조각난 삶을 다시 이어 붙이는 과정은,
어쩌면 처음보다 더 창조적인 여정이다.
우리는 한 문장을 끝내고,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존재들이다.

인생은 시다. 의미 없이 줄을 바꾸고,
문맥 없이 말들을 중얼거려도,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시가 된다.
삶의 마침표는 결말이 아니라, 숨 고르기다.
리듬이다.
고요의 자락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퇴직 후 낯선 바닷가를 여유롭게 걸을 수 있고,
이혼 후 아끼던 기타를 가슴에 안고
다시 새로운 곡을 연주할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
정원에 새 나무를 심을 수도 있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마침표를 찍는다.
한 사람의 끝에서, 한 문장의 끝에서,
때로는 하루의 끝에서.
그리고 쉼표처럼 잠시 멈춘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천천히 다음 문장을 쓴다.
그 문장은 이전보다 덜 화려하지만,
훨씬 더 진실하고, 나를 닮아 있다.

삶이란,
수많은 마침표와 쉼표로 이어지는 한 편의 시.
그 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쉼표처럼 웃고,
쉼표처럼 울며,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써 내려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마침표마저도
밤하늘의 별처럼
가장 고요하고 찬란한 빛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