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길
여러 해 전 어느 날, 어스름 저녁이
낮과 밤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도심 외곽, 고속화 도로를 달리던 나는,
교차로 너머로 길게 늘어진
붉은 브레이크등 행렬을 보았다.
마치 도시의 심장 박동처럼 점멸하는 불빛들.
피곤한 이들의 귀가 행렬,
혹은 어디론가 향하는 이방인들의 흔적.
나는 엉겅퀴처럼 그 틈에 섞여 있었다.
교통량은 급격히 늘었고,
속도계는 느릿느릿 내려앉았다.
내비게이션은 재빠르게 새로운 경로를 제안했다.
오른편에서 회색 선 하나가 불쑥 눈에 들어왔다.
'잠깐이니 갓길로 가다 새로운 경로로?.'
잠깐 떠오른 그 생각은 마치 속삭임 같았다.
지금이라면 갈 수 있어, 그쪽이 더 빠르지.
마치 비밀의 문을 내게만 열어준 듯한 착각.
나는 방향지시등을 켜다, 이내 꺼버렸다.
비밀은, 결국 비밀로 남겨두는 편이 아름답다.
가끔 인생이란 도로 위를 달리는 것과 같다.
모두가 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지만,
속도도,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 길 위엔 늘 유혹이 있다.
막힌 차로, 옆으로 말끔히 비어 있는 갓길,
그곳은 위험한 특권처럼 존재한다.
규칙은 그걸 금지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정당한 이유가 있는 듯한 얼굴로
슬쩍 그 틈을 들여다본다.
지금만, 딱 이번만.
그렇게 한 번쯤은 모두가 내면의 갓길을 응시한다.
삶에서의 갓길 또한 다르지 않다.
부정 입학, 위조된 이력,
혹은 타인의 노력을 슬쩍 딛고 선 자리들.
그 길의 끝엔 언제나 냉소가 있고,
꺼져버린 미등이 있다.
편리함은 순간이지만,
그 댓가로 잃는 것은 양심이 상처난 평온이다.
그날 내가 지나쳐온 갓길엔,
사고를 당한 차량이 뒤늦게 흔적을 남겼다.
정차된 차 옆에 선 운전자는,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나였다.
갓길은 도로의 공간이 아니다.
때로는 우리가 욕망의 속도를 견디지 못해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질서의 바깥, 윤리의 바깥,
자아의 바깥을 향한 갈망 그 자체다.
우리는 빠르게 가고 싶어 하지만,
빠르다고 바르지는 않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본래의 이유는 흐릿해지고,
‘도착’이 ‘방향’보다 중요해진다.
그럴 때, 사람은 종종 본질을 잃는다.
나는 갓길을 지나쳐 간다.
그 길을 바라보며 속도를 늦춘다.
어쩌면 이 느린 운행이야말로
내 삶의 리듬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나를 앞지르고, 나 또한 누군가를 앞지른다. 그러나 도로 위에 남는 것은 흔적이 아니라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 그뿐이다.
차창 밖, 나뭇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갓길 위에 내려앉는다.
아무도 밟지 않는 공간에
조용히 스러지는 작은 존재.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눈에 담는다.
삶도 그러하다.
누구에게나 갓길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기의 대피소이지,
질주를 위한 편법이 아니다.
밤이 짙어진다.
전조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도 나는 정해진 차선을 따라 달린다.
누군가는 더 일찍 도착하겠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속도와 나만의 리듬으로,
지금 이 길의 모든 풍경을 가슴에 담는다.
비켜서고 싶은 마음을 수없이 누른 끝에,
내가 진짜 도착하고 싶은 곳에 다다를 것이다.
삶이란 결국 갓길을 지나치며 지켜낸
중심선의 연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