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늦은 오후, 조용한 미술관 한편에서
나는 한 그림 앞에 발이 묶였다.
그것은 자화상이었다.
빛과 그림자가 나란히 얼굴 위에 내려앉은,
고요하지만 숨죽인 외침 같은 풍경.
화가는 자신의 눈동자에조차
작은 어둠을 심어 두었다.
찰나를 붙든 붓끝에서
빛은 오히려 따스했고, 어둠은 더 깊었다.
그 둘은 마치 한 인격 안의
상반된 목소리처럼 공존하며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자화상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내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 얼굴엔 어떤 빛이,
또 어떤 그림자가 스며들어 있는가.
자화상을 마주하는 일은
곧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한쪽은 밝고 또렷하되,
다른 한쪽은 어둠 속에 잠긴 눈동자.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 앞에서
나는 눈길을 피했다.
그는 왜 자신의 얼굴을 갈랐을까.
빛은 육체의 맑음을,
그림자는 영혼의 심연을 품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것은 세상의 질서에 길든 이성과,
그 질서 너머의 감정이 충돌한 흔적이었을까.
그 순간,
나는 나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안에도 그런 균열이 존재하는가.
나는 오랫동안 조용하고
단정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조심스럽게 고른 말,
절제된 웃음, 깔끔한 매무새.
예의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다듬고,
품격이라는 말 아래 마음을 정돈했다.
그러나 단정한 외양 너머에는
질투하고,
홀로 앞서고 싶어 하며,
남의 몰락을 은근히 바라는
어두운 감정이 숨어 있었다.
때로는 초연한 척,
세속을 내려다보는 구름 위의 사람처럼 가장했고,
또 때로는 사소한 욕망 앞에 무너졌다.
겉은 유리처럼 맑지만,
속은 이끼 낀 바위처럼 미끄럽고 혼탁했다.
이유 없이 크게 웃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고,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들을
누군가에게 퍼붓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얼굴을
오랫동안 외면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었다는 것을.
누추하고 낯선 감정들마저도
결국은 나를 이루는 빛의 조각이었음을.
만약 내가 자화상을 그린다면,
그것은 단색의 초상이 아닐 것이다.
두 겹의 투명 필름처럼 겹친 이미지,
하나는 정제된 선,
또 하나는 울퉁불퉁하고 찢긴 곡선.
그 둘은 서로를 파고들며 충돌하지만,
결국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낸다.
나는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끊임없이 분열하는 하나다.
어쩌면 나는 두 개의 정원을 품고 살아간다.
한쪽엔 눈 덮인 정결한 정원,
다른 한쪽엔 들불처럼 타오르는 정원.
나는 그 경계에 서서
어느 쪽으로 발을 디뎌야 할지 망설인다.
초연과 탐욕, 온유함과 격정,
이성과 감성의 사이에서
나는 종종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
가장 당혹스러운 건,
이 모순들이 때로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순수와 욕망이 뒤섞인 감정의 스펙트럼은
나를 인간답게 만든다.
감정의 파편들이 내 안에서 부서질 때,
그 잔물결 속에서 나는
진실의 반짝임을 본다.
그것은 투명하지 않지만 정직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진실하다.
나는 아직 내 자화상을 그리지 못했다.
아니,
그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내 안의 어둠이 너무 어두워서,
내 안의 빛이 지나치게 꾸며진 위선일까 두려워서다.
나는 지금도 그 중간 어딘가,
빛과 그림자의 경계선에 얼룩진 채 서 있다.
언젠가 붓을 들게 된다면
나는 먼저 내 안의 어둠과 마주 앉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프게 나를 찌르더라도,
누군가를 향한 가시가 되어버릴지라도,
나는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빛에도 말할 것이다.
너무 오래, 정결이라는 이름으로 널 억눌러 왔다고.
내가 진정 그리고 싶은 자화상은
명암이 아닌 투명도의 기록이어야 한다.
숨기지 않고,
다만 고르게 드러내는 정오의 빛처럼.
그러나 나는 안다.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무색의 진실은 때때로
가장 눈부신 거짓이 된다.
빛에 너무 가까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가 있어야 형태가 생긴다.
그러니 그 그림은 선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빛과 어둠이 얼룩져 만든,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무늬일 것이다.
그 얼룩 속엔 나의 진짜 얼굴,
부끄러운 욕망과 소박한 기도,
가식과 진심, 나약함과 용기가
모두 스며 있을 것이다.
그림 앞에 선 나는, 마침내 알게 된다.
완전하지 않기에, 나는 살아 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난 감정들이야말로
내 안에서 가장 밝게 타오르는 빛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것이,
내가 그려야 할 자화상의 진짜 색일지도 모른다.
작가 노트
이 글은 미술관에서 마주한 한 자화상을 통해,
내면의 이중성과 모순을 들여다본
성찰의 기록입니다.
단정함과 욕망, 이성과 감성,
초연과 집착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으려 애써온
자기 얼굴을 응시하며,
나는 묻고 또 대답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잡한 감정과
모순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결핍이 아닌 존재의 증거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자신 안의 그림자를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 어둠은,
때로 빛보다 더 진실한 얼굴이 될 수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