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노인을 보았다.
손에 쥔 낡은 스마트폰은
오래된 장신구처럼 손끝에 매달려 있었고,
그는 그 작은 화면으로 들어갈 듯 응시하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주위의 소음과 움직임엔 조금도 관심 없이,
그는 철저히 그 안의 세계에 잠겨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인간은 무언가에 빠져들지 않고는
이 견딜 수 없는 현실의 틈을
온전하게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몰입은 본능이다.
그것은 삶을 견디는 방식이며,
때로는 자아를 피신시키는 통로다.
시인 릴케는
“우리의 모든 일은 그리움에서 시작된다.”
라고 했지만, 나는 조심스레 덧붙이고 싶다.
우리의 모든 중독은 ‘결핍’에서 시작한다고.
누구도 온전하지 않은 이 삶의 균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인가에 빠져들어
그 틈새를 메우려 애쓴다.
술과 담배, 커피, 사랑, 신념,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찾는 스마트폰 세상.
이 모든 것은 현실을 희석하는
작은 불꽃들이다.
몰입이라는 말은
언뜻 밝게 빛나는 단어처럼 들리지만,
그 깊은 어둠 속엔 중독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누군가 말했다.
“중독은 의지로 가장한 절망의 형식이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아주 천천히, 그리고 은밀히 사로잡힌다.
어린 시절, 한때 나는 책에 중독되었었다.
활자는 말없이 속삭이는 마법이었다.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무 책이나 보며
눈을 열고 뇌를 건너 마음을 물들이며,
글 속에서 나를 잊었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기묘하게 나를 만났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나’에게 중독되었다는 것을.
고고한 체하며 책에 매몰되던 그 행위가
사실은 나 자신을 미화하는 도취였음을.
몰입은 언제나 가장 매혹적인 얼굴로
자신을 위장한다.
몰입은 “잊는 일”이다.
시간을, 허기를, 외로움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잊는다.
그래서 사람은 몰입을 사랑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붙드는 일”이기도 하다.
몰입은 우리를 풀어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조용히 묶어둔다.
이 모순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마치 고양이에게 홀린 쥐처럼,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얽어매며
낭떠러지 끝을 향해 걸어간다.
그 끝에 황홀함이 기다릴까,
아니면 황폐함이 도사리고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몰입은 자아의 확장이다.
인간은 자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식의 열망을 품고 산다.
예술가가 그림과 음악에 스며들고,
연인이 서로의 심연을 오고 가며,
기도하는 사람이
신과 합일하고자 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초월이다.
하지만 그 초월은 완전하지 않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무게와
결핍의 자리로 돌아온다.
빠져들었던 만큼,
돌아오는 길은 길고 서늘하다.
그 길 위에 남은 감정의 잔해는
인생이라는 태피스트리에 실처럼 얽혀 남는다.
몰입은 삶의 본질이자 그림자다.
진실과 망상의 경계에서 춤을 추며,
한 걸음만 삐끗해도 그것은 파멸이 된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
사랑에 눈먼 남녀,
끝없는 성형의 미망에 잠겨버린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같은 이름의 그물 속에 있다.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말이
입술 끝에 맴도는 순간,
이미 우리는 깊이 잠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빠져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또 다른 진실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
“나는 무너져야 비로소 나였다”고.
몰입은 자아를 무너뜨리고
그 잔해 속에서 새로운 ‘나’를 조립하게 한다.
파괴는 곧 창조의 시작이다.
다만 그 불꽃을 어떻게 다루느냐,
그것이 관건일 뿐이다.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에 사로잡히길 원한다.
신념이건, 사랑이건, 예술이건,
혹은 단지 작은 흥밋거리일지라도.
그것은 현실의 무게를 이기기 위한 출구다.
하지만 그 출구는 양날의 칼을 지니고 있다.
도피는 안식이 될 수 있지만,
어느새 감옥이 되기도 한다.
몰입은 때로 숭고하고, 때로 치명적이다.
한 작가는 말했다.
“예술은 중독과의 싸움이다.”
빠져들되, 침몰하지 않기.
그 안엔 철학이 있다.
삶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는가로 기억된다.
평범한 일상도, 휘몰아치는 사랑도,
절망의 밤도.
그 모든 순간이 몰입의 불빛 속에서 탄생한
존재의 흔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