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여백이 있는 삶

이 얀 2025. 5. 15. 07:28

살아간다는 건
점점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일이라 여겼다.
빠르게, 더 멀리, 더 많이.
도심의 속도에 나를 맞추기 위해
한때는 나를 잊을 만큼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문득 돌아보니,
가장 소중했던 것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
너무 작고 조용해서, 지나치기 쉬웠던 풍경들.
나는 이제서야 그것들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사를 준비할 때마다 안 입는 옷들을 정리한다.
그렇게 몇 번을 정리하니, 옷걸이가 남아돌아
장 안이 거창한 고민 없이도 조화롭다.
단출함은 선택을 단순하게 하고,
단순함은 마음의 군더더기를 말끔히 걷어낸다.
물건이 줄어드니 의외로 시선이 늘어난다.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 역설.
여백이 넓은 그림처럼,
나의 하루도 숨 쉴 틈을 갖게 된다.
삶은 그렇게, 덜어냄으로써 더 풍요로워졌다.

예전엔 사진여행이 주는 낯섦과 자극이 좋아
자주 멀리 떠났다.
그러나 이제 더는 멀리 가지 않는다.
여행 대신 가까운 동네 길을 걷는다.
정해진 루트의 길목마다
나무들의 계절이 바뀌는 것이 보이고,
고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햇살을 고른다.
바람이 건드리고 간 민들레는
갑작스레 하늘을 날아오르며 내 마음을 건드린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다가온다.
이전의 나는 이런 민들레를 밟고 지나갔고,
그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발끝에 머문 작은 숨결조차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한때는 무심히 대했던 것들이
이제는 서정시의 한 행처럼 다가온다.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속도를 늦추었을 뿐이다.
감각은 느림 속에서 피어난다.
바삐 흐르면
아름다움은 배경음처럼 희미해진다.
빛나는 것은 언제나 단순하다.
새벽빛, 윤슬, 아이의 웃음, 저녁노을.
삶도 그랬다.
소유가 아닌 경험, 장식이 아닌 본질.
나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풍요로움은 많음에 있지 않고, 깊음에 있다.

산책하던 어느 날,
갑작스레 내린 봄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었다.
우산을 쓰지 않았다.
비는 처음엔 차가웠지만,
이내 한 겹의 평온이 되어 등을 덮었다.
그날 나는 ‘적셔짐’이라는 감각이
얼마나 온전한 정화인지를 알게 되었다.
젖은 옷보다 훨씬 깊이 스며든 건 마음이었다.
단순하고 정제된 삶은 그렇게 나를
하나의 감각기관으로 만들었다.

무엇 하나 이루려 애쓰지 않았던
하루 끝에 마시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은,
만찬보다 포만했다.
이 고요함 속에선 혀도, 눈도, 손끝도 민감해진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얼마나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해졌다.
적게 가졌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충만한 결핍의 맛이었다.

생각이 많을 때마다 글을 쓴다.
노트북에 생각을 천천히 적어 내려갈 때
손끝에서 마음에 쌓인 무게가 빠져나간다.
마치 슬픔이나 번민도 함께 빠지는 것처럼.
속도는 더디지만, 그 느림 속에서
마음이 마침내 자신의 속도를 찾는다.
느림은 단순함을 만들고,
단순함은 본질을 끌어낸다.

세상의 속도가 어지럽고 빠르게 느껴질 때,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 삶을 관조한다.
이제는 삶을 장식하려 하지 않는다.
보여주기보다는 느끼기를 택한다.
덜 갖는 것의 미덕을 이해했고,
더 깊이 경험하는 삶의 풍요로움을 맛보았다.

여백이 있는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비워낸 자리마다 감정이 자라고,
잊고 지냈던 내가 돌아온다.
단순함은 결핍이 아니라,
본질과 마주하는 방식이다.
진정한 풍요는 ‘여백’에 있다.
여백이 있는 종이에 시가 스며들고,
여백이 있는 삶에 사랑이 흐른다.
비워낸 자리마다 오래 잊고 있던 감정이 자라고,
오래 보지 못했던 내가 자란다.

밤이면 창문을 연다.
창 너머 고요한 하늘 아래 별 하나.
그 하나를 보며 나는 조용히 다짐한다.
서두르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가리라고.
그 속에 깃든 거룩한 충만을 잊지 않겠노라고.
지금의 나는,
덜 가진 만큼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고요한 깨달음은,
내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