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 닮은 봄날의 진동

한 줌 바람이
쨍쨍한 햇살을 식혀주던
여름 닮은 봄날,
무심히 깔린 오후의 평화 속에서
찻잔 속 잔물결처럼
갑자기 내 마음이 진동을 한다.
조용한 숨결 같던
나의 오래된 고요를 깨웠다.

의도하지 않은 틈에서
말없이 들어와
모든 것을 부드럽게 무너뜨린다.
내 마음은 책처럼 얇은 종이였지만,
그 위를 지나가는 그녀의 말 한마디가
촉촉한 잉크처럼 스며들었다.
이름도 쓰지 못한 감정이
그 자리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랑을 계획한다,
처음엔 정해진 노선을 따라
걷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은 지도 없는 여행자,
길 위의 햇살 한 점에도
머무를 줄 알고,
낯선 눈빛 하나에
생의 궤도를 틀 줄 안다.

저녁 냄비에서 피어나는 찌개 냄새처럼,
갑작스레 피어난 감정이
사소한 일상을 덮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랑은 번갯불이 아니라,
마치 오래된 시계태엽처럼
예고 없이 돌아가는
시간의 은밀한 리듬이라는 것을.

흔들리는 건
항상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 떨림 속에서
나는 ‘함께’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천천히 발음해 보았고,
그녀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오래도록 불러 보았다.

결국 사랑은,
배워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익어가는 태도였다.
계획에서 어긋나고,
기대에서 미끄러지는
그 모든 순간이
우리를
서로에게 맞춰가는 기쁨이 되어준다.

그러니,
예측 불허의 마음에도 겁내지 않기를.
그건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가장 조용한 신호일 테니.
그녀가 건넨 짧은 아침 인사
"잘 지내시죠?"
그 한 문장이 내 하루를 다시 쓰게 했다.

늦은 저녁,
조용한 바람 한 줄기와
한 모금의 커피 향에
이토록 많은 마음이 숨어 있다면
사랑이란 얼마나
작은 일로 시작되는지,
나는 이제
조금쯤 알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자꾸 사랑을 배우려 한다.
하지만 어쩌면
사랑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인지도.
의미를 묻기보다 그저 한 페이지씩
마음에 펼쳐두는 일인지도.
나는 오늘,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를 배웠다.

느닷없이, 조용히,
그러나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