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잔잔한 파도가
제주 바다를 어루만지는 듯한 소리에 이끌려,
나는 조용히 화면 앞에 앉았다.
그 속에서 들려오는 건 말이 아닌 숨결이었고,
움직임이 아닌 정서였다.
"폭싹 속았수다"
그 한마디는 마치 누군가의 인생 전부를
담아내는 무언의 고백처럼 가슴에 내려앉는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스토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숨’이다.
할망이 찻잔에 떨어뜨린 소금 한 알처럼,
삶의 쓴맛과 단맛이 조용히 배어드는
섬세한 비가(悲歌)였다.
시대의 굴곡과 함께 휘청인 청춘들이 있었고,
그들에겐 우리가 잊고 있던
고요한 위엄이 있었다.
대사가 많지 않았어도,
그들의 눈빛은 풍경처럼 깊고 고요했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존재의 중심을 말하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말보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누군가는 그 침묵을 상실이라 부를 테지만,
나는 그것을 기다림이라 기억하고 싶다.
사랑이든, 꿈이든,
혹은 자기를 이해하는 일까지도.
그 모든 중요한 것들은 언제나 늦게 온다.
늦게 오기에, 더 깊이 스며든다.
그래서 그들의 침묵은 사랑이었고,
포기하지 않는 몸짓이었다.
제주의 바람은 흔히 자유를 뜻하지만,
이 드라마 속에서 그것은 이별이었다.
매 순간 스쳐 가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의 얼굴,
인연과 오해, 고백과 후회가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흩어진다.
그리고 그 흩어진 감정들이,
어느새 우리 마음속
작은 언덕 위에 내려앉는다.
그 바람은 무정하지 않다.
다만, 모든 것을 다 안고 가는 법이다.
우리가 놓친 말들, 흘린 눈물,
속삭이지 못한 진심까지도.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 드라마는 존재의 유한성을
아름답게 노래한다.
“살면 살아진다.”
말 한마디에 담긴 심연은,
삶을 낭비로 보지 않고 ‘흘러가는 것’으로
인정하는 지혜를 품고 있다.
그것은 마치 바람처럼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것.
그런 존재들이 이 드라마를 가득 채운다.
감상하는 내내, 나는 낡은 돌담에 핀
한 송이 해국(海菊)을 떠올렸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피어나는 꽃.
그게 바로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의 존재 방식이다.
그들은 영웅도 아니고, 실패자도 아니다.
그냥 살아내는 사람들.
하지만 그 ‘살아냄’이
얼마나 눈부시고 숭고한 일인지,
우리는 종종 잊는다.
드라마는 그 망각을 흔들어 깨운다.
마치 새벽 첫 기도로 잠든 마음을 두드리듯.
"폭싹 속았수다"는 결국,
우리가 외면했던 일상의 시(詩)였다.
흔들리고 상처받고,
그러나 끝내 사랑하고, 품어내고,
흘려보내는 존재들.
가족이란 무엇이고,
부모와 자식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런 이야기들이 나의 마음 안에서
오랜 여운으로 맴돈다.
사랑은 어쩌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달리해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핀다.
그 꽃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힘들었다고 느낀 모든 순간이,
사실은 삶이 나에게 보내준
가장 진실한 얼굴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그 진실이,
때로는 가슴을 찢고 들어와,
영혼에 조용히 말을 건다고.
"이만하면, 참 잘 살아낸 거야."
"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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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살아지게 한다
“살면 살아진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처럼,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흐르면
모든 슬픔이 무뎌지고,
상처는 저절로 아물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시간만으로 아픔이 잦아들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잔혹한 고독을 부수는 한 줌의 온기
죽음은 그것만으로 비참하다.
그러나 더 처참한 것은
남겨진 이들의 고독이다.
자기 안에 움츠러들어 “내 탓”이라 비관하며
죽어가려 할 때,
가까운 이의 다정한 위로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
“네 잘못 아니야”.
“네 곁에 있을게”라는 한마디가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서로의 눈동자가 삶을 이어주는 힘
결국 사람을 살리는 힘은
바로 ‘타인의 시선’이다.
나를 바라봐 주는 눈,
내가 버틸 이유가 되어 주는 존재.
그 눈빛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숨을 쉬고, 걸음을 옮긴다.
연약한 나비가 허물 벗고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시간만큼이나,
우리도 서로에게 기대어 버텨낸다.
공동체가 감싸안는 연민의 울타리
“사람 하나 살리는 데는 온 고을이 필요하다.”
개인의 슬픔에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연대할 때,
비로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된다.
가족이든 친구든 마을이든,
인간은 서로의 고통을 나누며 인간다워진다.
서로를 연민하고,
그 연민에 기대어 우리는 간신히 일어난다.
불가능을 현실로 만드는 사랑과 연민
강인함을 요구받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연약함을 숨기려 애쓴다.
하지만 진짜 힘은,
끝까지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누군가를 연민으로 품을 때,
그 연민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삶을 다시 잇는 기적이 된다.
비현실이라 여겨지던 그것이
현실이 되는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
삶은 고독하고 외로움을 동반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고 견뎌내며,
서로를 사랑하는 순간,
비로소 삶은 살아진다.
누구 하나 홀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우리 모두의 눈동자가 서로를 지켜 주기를.
*글과의 연관성을 높이기 위해 부득이하게
사진은 제 저작물이 아닌 인터넷에서 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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